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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오라비행 Aug 03. 2019

퇴근 후, 휘게와 회개 사이

수요윤


1. 해방
 퇴근길에 이어폰으로 듣던 노래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바꿔 퇴근의 해방감을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얼굴과 가슴, 몸을 두르고 있던 코르셋을 홀가분히 벗는다. 어느덧 호연지기가 되어 후줄근해진, 어딘가에 어제 먹던 초콜릿을 묻힌 티셔츠로 몸을 감싼다. 안온한 밝기의 조명을 켠다. 등받이 쿠션에 몸을 기댄다. 냉장고에 맥주가 있던가. 한 잔 할까. 기분 따라, 컨디션 따라. 초점은 흐릿하게, 방 어딘가에 눈이 머무는 대로. 친구가 선물로 놓고 간 담뱃갑에 눈이 머무르는 날에는 잘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 한 개비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온 귀에 선율이 감돌도록 소리를 키우고는 어설프게 몇 모금. 밤 향기를 마시며, 밤의 일렁이는 불빛들을 지그시 마주하며. 이래서 다들 담배를 피우는구나. 성급한 일반화를 하며 옥상을 배회한다. 몸이 으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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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취미
 직장인이 되고 필수가 된 취미생활, 억압된 자아를 분출하는 시간. 요즘 취미는 두 가지이다. 그림과 요가. 그림과 요가는 시간과 공간을 잊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림의 선과 색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시계의 일정한 째깍거림은 정지해버린다. 요가의 흐름을 한껏 타다가 마무리까지 하고 나면 시간은 순간 이동한 듯 훌쩍 지나가 있다. 그림을 다 그릴 때 즈음 또는 요가를 마칠 즈음이면 해와 달은 금세 교대를 마친 채 풍경들을 새롭게 품고 있다. 공간을 나설 때면, 들어설 때는 보이지 않았던 불빛과 밤의 냄새가 풍겨온다.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각각의 다른 매력들 때문이겠다. 그림은 일상을 생경하게 느끼게 한다. 인물화를 좋아한다. 최근에는 노인을 그렸다. 노인의 주름을 그리다 보면 ‘원래 그런 것은 없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원래 그런 주름은 없었기에. 삶을 살아온 흔적이기에. 사물들도 마찬가지다. 원래 그런 얼룩은 없고, 원래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없다. 무언가에 의해 흔적이 남겨졌을 거다. 흔적은 사연을 떠올리게 하고, 사연은 그 대상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요가는 생경함에서 익숙해짐을 느끼게 한다. ‘아쉬탕가 마이솔’을 수련하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 뜻을 찾아보니, 인도 마이솔 지방의 전통 요가 수련법이라고 한다. 호흡, 동작, 시선을 통합하여 일련의 동작들을 잡아간다. 프라이머리 시퀀스의 중간 정도까지 나갔다. 처음에는 동작 하나하나가 낯설고 어설프디 어설펐다. 두 달 반 정도의 시간 동안 같은 동작들을 반복하다 보니 익숙해짐을 느낀다. 해도 해도 안 될 것 같던 동작은 시나브로 그럴듯해진다. 반복을 통한 안정감과 친숙함은 내일을 마주할 수 있는 기대감과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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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남
 직장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은 과할 정도로 많이 이루어지기에, 뭐랄까, -공/사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꽤나 하찮지만- 공부 또는 연대 공동체와 같은 공적 일정이 아니면 퇴근 후에는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 편이다. 공부나 연대 등의 일정에서는 가면을 계속 쓸 수 있는 인내심이 (아직까지는) 당연하게 유지된다. 물론 집에 도착하는 순간 어느 때보다도 그 가면을 극적으로 벗어던지지만. 한편 사적 관계에서는 그러한 당연한 의무감이 사라진다. 하지만 가면을 벗으면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정도로 누추한 피폐함과 퀴퀴함이 예상치 못하게 피어 나올 때가 있다. 직장 3년 차가 되면서 새롭게 익혀진 것은 이러한 꼬질함을 자정 하는 방법이다. 꼬질꼬질한 나를 홀로 담담히 마주하고 만끽하기. 말 그대로 꼬질한 채 씻지도 않고 혼술 하다가 잠든 나를 다음날 발견하기, 드러누어 내가 얼마나 하찮은지 ‘윤쓰 하찮음 리스트’를 하나하나 곱씹어보기, 우주적 관점에서 나란 존재는 플랑크톤에 붙은 먼지 콩알보다도 조고맣고 작을 텐데 얼마큼이나 먼지 콩알만 할지 가늠해보기 등등.
 연대도 삶과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직장에서의 원치 않는 빼곡한 일정과 관계로 마음이 황폐해지는 나날들이 이어질 때면, 연초 패기 가득해 들었던 몇몇 연대 공동체의 단톡 방 알림은 읽씹의 연속으로 넘기게 된다. 품을 여유가 없는 좁고 얕은 옹기. 이러한 나의 옹기를 혐오하기도, 서글프게 바라보기도 해 본다. 비건이지만 밀크 초콜릿을 한 움큼 먹었어. 페미니스트지만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해 함구했어. 오늘의 PC 게이지는 어느 정도로 잡아서 나를 질책해볼까, 격려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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