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은 위로
나은이는 이야기꾼이었다. 명절을 지내고 양가를 다녀오면 라디오 사연 같은, 주말 저녁 드라마 같은 왁자지껄한 명절 에피소드를 잔뜩 들려주곤 했다. 대가족 모임이 낯선 교실 안의 다른 아이들과 나는 나은이의 큰아버지며 삼촌, 이모와 고모들, 하나같이 별난 사촌들 그리고 대단한 할머니들에게까지 내적 친밀감을 쌓으며 뒷이야기를 기다렸다. '우리 할머니' '우리 삼촌' '우리 아빠의 형'이라고,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우리'를 붙여 말하던 나은이는 외동아이였다.
유난히 잘 따르던 사촌 언니의 배낭 여행기를 바다 건너 교실에 앉은 친구들에게 전하는 중이었다.
가족과 일가친척 모두를 가까이 관찰하고, '우리'를 꼭 붙여 말하는 걸 보면서, 외동아이라서 북적대는 분위기를 반기고, 외로움 때문에 사람들 이야기에도 그리 진심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짧은 대답, 그리고 파닥거리는 손사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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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졸업하기 전부터 아르바이트로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러다 어느새 익숙해졌고 전업이 되었다. 전업이 되고 익숙해졌나?!
가르치고 배우는 이 일은 보람이 분명해 중독성이 강했지만, 고단했다. 그리고 고단함의 대부분은 어른 사람에게서 왔다.
책만 폈다 접고 가는 학생, 내내 눈을 치켜뜨고 원인 모를 공격성을 표현하는 학생, 교실에 누가 있든 상관없이 욕을 하는 학생, 작정하고 기싸움을 걸어오는 학생, 다른 데서 부풀어 오른 화를 내 앞에서 풀던 학생이 많았다. 그런 아이들을 상대하는 날이면 열이 났지만 결국에는 넘어가고 풀어냈다. 전부는 아니었어도 아이들로 인한 화는 옅어지고 잊혔다.
나를 상하게 하는 건, 어른들이었다. 가르치는 일이 직업이었지만, 학생을 가르치기도 전에 내가 반드시 배워야 할 것들이 잔뜩이라 했다. 나를 가르쳐 자신의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이들에게서 된소리를 들었다.
가장 오래 일했던 지역은 건물마다, 층마다 학원이 차고 넘치는 곳이었다. 할 수 있는 수업이 많았고, 열심히 한 만큼 잘 벌었다. 먹고사는데 실리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한 번씩 겪는 비상식의 말과 행동에도 의연해야 했다. 그런 척을 제법 잘 해냈다 싶은 날도 있었지만, 끝내 담담해지기란 쉽지 않았다. 무례한 태도를 거침없이 보이는 그들과 똑같고 싶지 않아 혼자서만 깍듯하느라, 많이 울었고 많이 상했다.
기운을 빼고 교실로 돌아와 보면 눈앞의 아이가 그들을 그대로 닮아있었다. 다행히 아이들에겐 밉지 않은 구석이 하나씩은 있었고, 덕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다짐에도 상처의 반복은 달라지지 않았고 결국 그 지역을 나왔다. 나와 맞지 않는 곳이었고, 다 끝난 일이다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두려움이 남았다. 부모가 되는 두려움 말이다.
나의 미숙함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들처럼 경우를 지킨 줄 착각에 빠지고, 자식일에 눈이 멀어 스스로의 말과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 내뱉는, 몰상식한 부모가 될까 봐 두려웠다. 아이가 그런 나를 닮는다면 아찔했다. 나는 누군가의 부모가 아닌 사람으로 살기로 결정했었다.
지금은 안다. 부모와 자식의 연결과 닮아감은 하나의 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은 내가 짐작한 두려움보다 더 큰 일들이 자녀를 키우는데 관여하고 그 보다 더 두려워할 일들이 도처에 널렸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하나씩 잘 해내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삶을.
다만 20대를 그리 보낸 강사에게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를 소중히 대하는 사람을 만나 혼자 아닌 둘이 살아가는 삶은 행복했다. 우리는 용기를 내어 두려움 반 설렘 반을 안고 '셋'이 되기로 했다. 부모 교실을 다니고, 쌓아둔 책을 읽고, 무엇보다 부모가 될 우리 자신의 삶을 돌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주변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혼자 크는 애들은 이기적이야.' '이다음에 혼자 남으면 외로워서 어쩐다니.' '적어도 둘은 있어야 의지하고 살지.' '셋째가 얼마나 이쁜지는 평생 가도 모를 일이 되겠지.' 뾰족한 참견들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약속은 딱, 셋이었다. '자신을 지키는 그래 좀, 이기적인 아이로 키워보겠어.', '어차피 혼자 가는 인생, 외로움을 아는 아이로 키우지.' 하며 참견에 맞섰다. 고심하며 다져간 교육관이 아니었다. 더 센 척하며 방어하고 싶을 뿐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떤 어른이 내게 이기적이라고 했다. 그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고는 한참을 울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가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도, 남들의 그런 말은 틀릴 확률이 더 높다는 것도 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움을 겪는 것이 자연스럽고, 삶이란 결국 혼자 걷는 길이라는 사실도 나는 안다.
아이를 낳았다. 신생아를 유아로, 유치원생으로, 초등학생으로 키워내는 일은 두려움도, 비장한 다짐도, 무차별 참견에 대응할 여력도 없이 정신없는 날들이었다. 어떤 날은 나름 꽤 괜찮았고 뿌듯했지만, 부모가 되는 일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의 부족함과 미숙함이 발각되는 일이었다.
인생에 대한 씁쓸한 발견은 나를 토닥이며 앞으로 밀어주었지만, 아이를 두고는 한없이 약해졌다.
아이의 세계가 내게서 조금씩 멀어질수록, 나 혼자 아이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걱정은 불현듯 출현했다. 아이의 외로움을 떠올리니 마음이 쪼개졌다. 센 척하며 꺼낸 말들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돌아가 이기적인 사람으로 자라게 될까 겁이 났다. 숙명의 외로움을 운운하던 목소리는 진작에 사그라들고 없었다.
나 혼자였던 세계가 둘이 되고 셋이 되기 위해 용기를 냈는데, 기적이었던 순간들은 밀려나고 혼자인 아이가 외로울까 봐,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일까 봐 걱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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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은이의 그 순간이 정말 좋게 들렸다.
이야기꾼의 말은 귀에 쏙쏙 들어온다.
열일곱에 혼자서 즐기는 장면을 가진 나은이를 보며, 그 아끼는 순간을 들려주며 나의 마음을 살피는 외동아이를 보며, 외로움과 기꺼이 손잡은 어리지만 잘 자란 한 사람을 보며 나는 위로받았다. 선생이 아닌 한 아이의 보호자로서 겪어온 순조롭지 않던 고민들이 보드랍게 달래 졌다.
그날의 대화 이후 나는 더욱 기꺼이 혼자 크는 아이의 보호자가 되었다. 말로는 부인하면서 마음 한 편에 떨치지 못했던 두려움의 부스러기들도 깔끔하게 털어냈다.
한 아이, 다자녀 가족의 장단점을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선택과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존중한다. 다만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은이의 시간이 언제나 명랑했던 것은 아니다. 사춘기를 지나왔고, 입시생으로서 진로와 미래에 대한 고민은 무거웠다. 그럼에도 나은이는 이미 즐겁고도 외로우면서 고단할지언정 그 모든 것을 인정하는 사람으로 '잘 살아내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나의 열일곱을 떠올리고 내 아이의 열일곱을 상상했다. 나의 외로움에 안심하고, 아이의 외로움은 내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보호자가 사는 방식이 함께 사는 아이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고 마땅한 부담이지만, 아이가 나의 전부가 아니듯 나 역시 아이의 전부가 아닐 테니, 결국엔 괜찮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그저 둥근 지구 위를 나란히 걸으며, 외로움도 즐거움도 각자의 몫을 누리면 될 것이다. 멀고도 막연했던 나의 열일곱과 아이의 열일곱 사이에, 홀로 음악을 듣던 나은이의 안온한 시간이 다리를 놓아주었다.
자신의 인생을 사는 아이들을 본다.
그들의 삶을 어리다는 말로만 둘러댈 수 없다. 정제되지 않은 생기는 별빛처럼 퍼져 나간다. 아이들의 곁에 머문 덕분에, 한 번씩 내게도 그 빛이 비친다. 그래서 나도 여기까지 온 듯하다.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