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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Jul 10. 2024

탄산온천 방문기

   얼마만인가. 벗은 사람들이 떼로 모여 있는 것을 본 일이, 그 속으로 내가 걸어 들어간 것이.!

온천에 들어서자 입구에서 받은 수건을 머리 위에 돌돌 돌려감은 얼굴들이 김 오르는 탕 위로 동동 떠올라 웃고 있었다.


   내 팔이 내 등에 닿지 않을 만큼 작은 아이였을 때, 엄마 손에 이끌려 목욕탕에 다녔다. 빨대를 쪼르륵 꽂은 요구르트 한 줄이나 딸기 우유에 쉽게 넘어가던 시절엔 등짝이 딸기 우유보다 빨개질 걸 알면서도 따라다녔다. 목욕탕 문을 열었을 때의 숨 막히는 공기 때문에 문 앞에서 화장실을 찾곤 했고. 혼자 씻는 게 편해진 이후로 찜질방에서 노는 날 말고는 목욕탕 갈 일이 별로 없었다. 뜨거운 공기는 여전히 숨이 막혔고,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스릴이라면 현실에서도 충분했으니까.

   

   가족 여행으로 떠난 제주도.  각자 원하는 장소를 하나씩 정하고 같이 가보기로 했는데, 아이가 궁금해한 곳은 바로 탄산온천이었다. 뽀글뽀글 달콤하게 터지는 환타 온천이라도 기대한 걸까. 어차피 목욕탕일 텐데. 하지만 여행자의 넓은 마음은 꺼리던 곳도 기꺼이 도전할 수 있지. 어색함을 이겨내고 입장을 하고 나면, 입장한 다음이 더 어색해지는 장소여도 말이다. 나는 어느새 신발장 빨간 열쇠를 손목에 걸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이어서였는지 후끈한 공기도, 여러 대의 드라이기 소리도 조금 반가웠다. 혼자 씻는 세월을 따라, 낯섦에 마주해도 괜찮다 맘먹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나 보다. 일시 정지 5분 후 빠르게 준비 완료. 어쩌면 여기는 일반 목욕탕이 아니라 무려 탄. 산. 온. 천. 이기 때문에 힘이 솟았는지도 모르겠다. 전날에도 왔던 사람처럼, 한 손으로 수건을 들어 몸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 바가지를 찾는 내 모습, 자연스러웠다. 새어 나오는 웃음이라니. 재밌겠는데?!


   특수탕 이용 안내문이 대단한 유명세만큼이나 거대한 글씨로 적혀 전면의 큰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있긴 한데, 읽고 또 읽어도 이해가 안 되었다. 어르신들은 안내판을 보지 않고도 몸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다. 이럴 땐 눈치를 챙기는 수밖에. 막 들어선 어르신의 뒤를 조심스레 따르다 보니 그제야 안내문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몸으로 배워야 하는 이용 방법이었다. 온탕에서 4-8분, 원수탕에서 10분 그러고 나면 탄산이 몸에 붙는데, (잘 지켜보시라) 그게 흡수되면! 그다음은 만병이 낫는 기적인가? 기필코 잔병 하나라도 떨구고 나가겠다는 각오로 부지런히 온탕과 원수탕을 넘나들었다. 효과의 시작을 보여주는 그 현상이 내 몸에서도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탕 위로 동동 떠오르는 얼굴 중 하나가 되었다.


   살집이 많은 몸, 뼈가 보이는 몸, 근육이 있는 몸, 매끈한 몸, 상처가 있는 몸, 부황 자국이 등판을 가득 채운 몸, 심지어 부항을 달고 다니는 몸, 십자가 목걸이를 걸친 몸, 옥빛 팔찌를 걸친 몸, 구부정한 몸, 꼿꼿한 몸, 나른한 몸, 쉼 없이 물을 끼얹는 몸, 도망가는 몸, 잡으러 다니는 몸, 궁금증이 생기는 몸,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는 몸, 차가워 보이는 몸, 목욕탕의 기운을 다 빨아들인 몸, 지인을 만나 반가운 몸, 같이 온 딸내미의 몸, 작은 엄마의 몸, 구석의 구석으로 향하는 몸, 물보라를 일으키며 탕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몸. 많은 사람들의 몸이 있었다. 벽과 모서리를 타고 걸으며 나 역시 하나의 몸이 되어 그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미끄러운 탕 밖에서 걸을 땐 발끝이 노랗게 변하도록 힘주어 걷고, 온탕과 원수탕을 들락거리는 순서를 반드시 지키는 그들. 소곤거릴수록 크게 울리는 장소에서 목소리의 크기를 조절하느라 물에 젖은 얼굴은 진땀을 빼고, 눈을 감고 앉았어도 다른 사람이 탕으로 들어올 때면 무릎을 세우거나 방향을 돌려 앉았다. 뜨끈한 안락함에 노곤해진 사람들은 느긋했지만 뛰어다니는 아이와 걸음이 떨리는 어르신의 몸이 지날 때면 다 같이 고개를 돌렸다.  

   희뿌연 수증기가 뿜는 아우라 때문일까. 다른 몸들은 닮아갔다. 어색함은 사라지고 뜨거워서 시원하다는 이곳만의 감탄 포인트에 취해버린 나 역시.   


   손가락 끝이 쭈굴쭈굴 변하니, 입술이 마르고 입이 근질거렸다. 어렸을 때 목욕탕에서 모르는 할머니들이 막 아는 척하고 말 거는 게 그렇게나 싫었는데, 성실한 탕 활동 끝에 찾아온 심심함이었구나 한다. 하지만 나의 기개는 그 정도는 아니므로, 원탕과 온수탕 넘나들기 왕복 일곱 번에 만족하며 이제 그만 나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려 몸을 일으키는데……


   “서울에서 왔수?”


건너편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하하하.


   다르나, 닮아있는 사람들 속에서 별난 것 없이 동동 떠오르는 얼굴 중 하나가 되어 보는 일. 꽤 재밌었다.  

한 때는 너무 싫었던 장소였는데, 그때의 이유들은 아무렇지도 않아져 버렸다. 내게 더 이상 남아있을 필요가 없는 것들이 흘러가는 시간에 딸려갔나 보다. 어른이 되니, 시간의 덕을 보기도 한다.


   제주도는 탄산온천!

다음엔 안내문 앞에 멈칫대지 않고 더 자연스럽게 탕을 넘나들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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