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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BOYOUNG Aug 18. 2023

살아 있다는 믿음과 쓰기의 마음 나누기

   살아 있다는 믿음과 쓰기의 마음 나누기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있을 텐데, 글쓰기라는 녀석은 참으로 무정하다. 좀체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도대체 글쓰기란 뭘까? 그리고 나는 왜 쓰려고 하는 걸까? 글쓰기. 사전적으로 보면 생각이나 느낌을 글로 표현하고 기록하는 일인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때문에 나는 이런 습관이 있다. 어디를 가든 기록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핸드폰을 꺼낸다. 식당에서 음식이 나왔을 때 ‘찰칵.’ 카페에서 커피가 나왔을 때 ‘찰칵.’ 산책을 하다가도 어느 전시회에 가서도 ‘찰칵.’ 어디서든 간편하게 순간을 기록한다. 이렇듯 사진으로 무엇이든 쉽게 기록할 수 있는데, 굳이 글로 기록할 필요가 있을까? 찰나를 기록하는데 용이한 것이 사진의 장점인데, 이러한 일회성의 간편함은 휘발성이 강하다. 그리고 사진은 순간적 이미지로 남는 탓에 그때의 느낌, 그때의 냄새, 그때의 대화, 기분 등 그로부터 비롯되는 복합적인 감각을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나 영상으로 충분히 기억하고 떠올릴 수 있는데요? 그러나 그 순간의 생생함이 어느 정도 소실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쓰기를 통해서 유일무이한 그때를 영속(永續)시킬 수 있다. 가령, ‘여름’을 떠올려보자. 여름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속에는 있다. 여름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라. 그것은 당신의 마음, 그 안에 있는 유일한 여름이다. 그 여름을 사진으로 꺼내보는 것과, 마음 안에서 꺼내보는 것은 다르다. 당신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생동하는 그 여름을 보여주는 것이 글쓰기이다. 내게도 살아 움직이는 무수히 많은 여름의 시절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각인된 여름 하나를 꺼내 써보겠다.






   여름의 해안도로는 완벽했다. 해안선을 따라 달리면서 너와 나는 여름의 곡선을 만끽했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경쾌하게 부서지는 파도. 짭조름한 바람. 마구 휘날리는 머리칼. 여름의 단면을 잘라 놓은 듯 한 차창 밖의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와!”

   해질녘의 여름 하늘을 보았을 때 나는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느 작은 항구에 즉흥적으로 차를 세운 뒤, 연보랏빛과 분홍빛이 뒤섞인 하늘을 보았다. 알 수 없는 환희가 차올랐다. 그것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실 때의 차오름이라고 해야 할까. 파스텔톤 하늘은 내 마음 안에 감실감실 가득 차올랐다. 함께 여행을 간 너는 핸드폰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런 너를 찍었다.

   “여기 좀 봐봐.”

   내 말에 너는 포즈를 취했고 나는 연신 셔터를 눌렀다. 찍은 사진을 보았는데 나는 갸웃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풍경과 사진에 담긴 풍경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풍경이 사진에 다 안 담기네.”

   나는 말했고, 우리는 말없이 여름의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날의 여름은 사진으로도 남아 있는데, 이것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 글로 기록하는 것은 또 다르다. 사진은 그 시절,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 중 하나인데,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잊을 수 없는 순간. 내가 보고 느끼는 그 순간이 사진에 다 담기지 않을 때. 사진을 초과하는 그 무엇. 그것이 움틀 때 나는 글을 쓴다. 무엇으로도 현현할 수 없는 나의 느낌, 나의 생각. 유기체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그것을 길어 올린다. 다른 한편 그것은 거대한 돌덩이를 깎아서 하나의 모양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다. 글쓰기를 통해서 하나의 모양이 만들어지고 나라는 존재는 조금 더 명확해진다. 이 느낌은 불명확한 삶의 복판에서 내가 살아 있음을 감각하게 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어서 이런 질문도 할 수 있다. 글쓰기라는 게 존재 감각에 국한된 건가? 물론 아니다. 글쓰기는 그것을 딛고 올라서서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행위이다. 글쓰기의 방향은 타인을 향해 있다.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서 그때의 감정, 지금의 생각을 나눈다. 문자, 메일도 모두 쓰기에 해당하지 않은가. 혼자 보는 일기라 해도 마찬가지다. 나를 객관화하여 마주할 수 있는 우리는 일기를 쓰면서 ‘나’라는 독자를 만난다. 그러니까 글쓰기는 언제나 타인에게―독자에게― 가닿는 행위이다. 글쓰기는 나의 존재를 지금 여기에 소환하는 동시에 내가 타인과 함께 있음을 공유하는 것이다.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유기적 접속 관계.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를 통해 갖는 살아 있다는 믿음은 쓰기의 마음 나누기가 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맞아, 그렇지.’ 공감하고 위안을 얻고 또한 위로 하게 된다. 나아가 살아갈 힘과 가능성을 얻는다. 그래서도 우리는 조금쯤 무모해질 수 있다.


   ‘응?’


   이쯤 되면 갸웃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글쓰기가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고 좋은 게 좋은 얘기만 일장 연설하는 거 아닌가? 글쓰기의 어려움은 분명 있다. 표현의 어려움이나 백지 위의 막막함…….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곤란은 쓰기 앞에서의 중압감이다. 그 앞에서는 대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위축된다.


   ‘내가 뭐라고…….’, ‘내가 이까짓 것 쓴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글을 쓴지 꽤 오래 된 나 역시 한없이 작아지곤 했다. 문단 데뷔를 못한 나는 글을 써도 되는 건가 싶었다. 한국에서 문단 데뷔라 함은 문예 잡지나 신문사의 신춘문예로 당선이 되는 절차를 말한다. 당선이 돼야 ‘작가’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문창과, 국문과 출신으로서 문단 데뷔를 하고 싶었던 나는 글을 쓰면서 늘 중압감에 시달렸다. ‘작가도 아닌 내가 뭐라고…….’


   그럼 작가란 뭘까? 작가의 작(作), 지을 작자(字)는 사람 인(人)자와 잠깐 사(乍)자가 합쳐서 만들어진 회의문자이다. 잠깐 사(乍)는 옷깃에 바느질하는 모습을 나타내는데, 사람이 옷깃에 바느질을 하면서 무언가 만들어 내는 걸 뜻한다. 그러니 ‘짓다’, ‘만들다’, ‘창작하다’의 의미를 품는다. ‘작’ 다음으로 ‘가’는 집 가(家)자이다. 가(家)자는 집 면(宀)자와 돼지 시(豕)자가 합쳐진 회의문자이다. 집에 가축을 들여 놓은 형국인데, 가축은 재산, 살림살이를 뜻한다. 그러니까 가(家)자는 집이라는 건물 안에서 가족이 살아가는 뜻을 내포한다. 두 글자를 합쳐보면 작가(作家)는 무형의 공간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소설가는 작가는 아주 정교한 집을 짓는 건축가라고 했다. 내가 볼 때, 건축이 무형의 공간에 유형의 장소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작가는 무형의 세계에 유형의 존재를 창조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간에 장소를 축조하는 것과 세계에 존재를 창조하는 것은 다르다. 나아가 보면, 건축은 인간 삶의 질을 물리적으로 변화 시킨다. 반면 작가는 인간 삶의 질을 정신적으로 변화 시킬 수 있다. 칼보다 강한 것이 펜이라고 하지 않던가. 작가가 갖는 무게감은 그런 것이다. 한마디에 한 인간의 모든 것을 무너트릴 수도, 전혀 새로운 내일을 맞이하게 할 수도 있다. 마구 어질러진 방을 볼 때의 느낌이 막막함이라면 중압감은 차원이 다르다. 전투기 조종사는 전투기를 조종할 때 자신의 몸무게에 여섯 배(6G) 많게는 아홉 배(9G)까지 견뎌낸다고 한다. 자신의 몸무게에 6을 곱해보라. 무게를 이겨내고 한걸음 내딛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글쓰기 앞에서 느끼는 중압감이란 건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한번도 스스로를 작가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작가가 갖는 무게감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알기에, 그 중압감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중, 나는 큰 병에 걸렸고 죽음 앞에 선 채 삶을 생각했다. 생사(生死)의 틈바구니에서 나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때로 독자 분들께서 장문의 인스타 DM을 보내주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쁨과 약간의 미안함이 섞인 울컥이었다. 나는 작가도 아닌데……. 내가 감히 누군가의 마음을 이렇게 동(動)하게 했다니. 괜찮은 걸까?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등단 절차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글을 쓰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걸. 등단을 했다고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동안 작가가 된다는 걸. 그렇게 글쓰기를 통한 나의 존재 감각은 한 권의 책이 되었고, 나는 작가가 되었다. 독자인 당신의 성원과 감화가 있었기에 나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당신과 쓰기의 마음을 나누고 싶다. 글쓰기 앞에서 주저 하지 않길 바란다. 당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으면 좋겠다. 당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그것을 보여주기를. 쓰기를 바란다. 작가가 될 당신을 고대한다. 글을 통해 당신을 만나서 함께 웃고 울고 싶다. 어쩐지 좀 부끄럽다면 나라는 독자에게 말을 걸어보면 좋겠다. 타인의 박한 시선이 걱정 된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가 아니니 걱정하지 말길. 무엇이든 진심인 사람은 닦달하지 않는다. 당신의 그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준다. 그러니 인색한 누군가가 있다면 되레 그의 삶을 품어주길 바란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작가가 되고 독자가 된다. 일면 글쓰기라는 큰 틀에서 역량에 맞지 않는 장중한 이야기를 푼 게 아닌지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은 확실히 말하고 싶다. 나는 당신을 지지한다. 우리, 같이 마음을 나누자. 그렇게 서로를 감각하고 응원하면서 아울러 내일을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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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영

1990년 경기도 이천 출생.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 수료.

에세이집 『서른이면 뭐라도 될 줄 알았지』 출간.

앤솔러지 시집 『지구 밖의 사랑』 출간.

시창작 동인 ‘행성’ 활동 중.

인스타그램 : information_zero0

이메일 : bylove1229@naver.com



글쓰기 앞에서 주저 하지 않길 바란다. 당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으면 좋겠다. 당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그것을 보여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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