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눈이 내렸다. 주차를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리는군. 예쁜 쓰레기.’ 가로등 불빛 아래 흩날리는 눈발을 보면서 이질적인 감정을 느꼈다. 좋은데 싫은, 싫은데 좋은 눈. 그래도 눈이 내리는 그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몸을 활짝 펴게 된다. 금세 눈이 소복이 쌓였고 나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걸었다. 나보다 먼저 밟은 녀석이 있었는데, 고양이였다. 고요히 내리는 눈을 보면서 고양이의 조심스러운 걸음을 상상했다. 미소가 지어졌다.
내리는 눈은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올해도 다 끝났구나. 끝났다고 생각하면 ‘한다고 해놓고 이건 또 못했네...’ 몇 가지의 감회가 떠오르기도 했으나, 어쨌든 여기까지 왔다는 후련함이 후회를 상회했다. 또 하나는 이제 또 시작이구나. 금방 또 내년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면 ‘한다해 해놓고 못한 그것을 해야지.’ 몇 가지 다짐을 해보게 된다. 나는 잠시, 흩날리는 눈발을 보며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알 수 없는 불편함이 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신체적 불편함이 아니다. 속담이 떠올랐는데, 마음 어딘가가 불편했다. 이런 속담이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새로 만든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다는 뜻으로 새 일을 시작할 때는 과거의 것은 버리고 다시 시작함을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다. 어딘지 균형이 맞지 않는 벽의 액자라든지, 자를 대고 줄을 그었는데 수평이 어긋났다든지, 그럴 때 느끼는 미묘한 불편함이 일었다.
‘왜 일까.’
집에 돌아와 전기장판을 켜놓고 누웠다. 이불을 덮었다가 발로 찼다가를 반복했다. 저 속담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 아닐까? 새로 만든 음식을 먹던 접시에 올릴 순 없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새로 빚은 술은 새 부대에 넣는 건 당연한 말이다. 비유적인 말이니 비유적으로 생각해보겠다.
새 학기가 되었다. 새 학용품을 산다. 3월에 학교에 간다. 새 학기이니만큼 새 마음을 품고 등교를 한다. 힘내자. 뭐 이런 뜻일 것이다.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겠다. 이해를 못한 것도 아니고 알겠다. 알겠는데, 그런데도 나는 도무지 납득을 할 수 없었다.
‘속담 하나에 심술부리는 나를 보면,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만 생각하려는 때, 내가 그럼 내년에 몇 살인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미묘한 불편함의 이유를 얼핏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삼십대 중반을 향해 간다. 이 말은 즉 삼십년 넘게 새해를 맞이해 왔다는 뜻이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내가 처음으로 나이를 먹는다는 걸 느낀 건, 초등학교 1학년이 됐을 때의 일이다. 1996년. 그 해는 대한민국에 문민정부가 들어선 해이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를 한 해이고, 십이지를 외운 해이기도 하다.(TV 애니메이션인 꾸러기 수비대의 오프닝 곡이 있다. ‘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 드라고 요롱이 마초 미미 뭉치 키키 강다리 찡찡이.’ 자축인묘 신유술해 진사오미……. 노랫말을 읊으면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1996년의 1월을 기억한다. 아침이었는데, 창가에서 빛이 기울었다. 겨울 특유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오늘이 1996년이야?”
“응. 새해야.”
박박 방바닥을 닦는 엄마는 열심히 청소를 했다. 나는 창가에 비친 빛과 청명한 겨울 하늘을 보았다. 갈빗대처럼 줄줄이 늘어선 연한 흰 구름이 흘어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한 살을 먹었으며, 이제 곧 초등학교에 간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그때 이후 나이를 먹는다는 건 학년이 올라가는 것이었고, 학년이 끝나고 나면 겨울 방학이 찾아왔다. 눈이 내렸다. 새하얀 눈이 내린 동네가 좋았다. 손이 시려도 꼭 눈송이를 뭉쳐보았다. 눈송이에는 알 수 없는 설렘은 물론, 어떤 기쁨과 환희가 뭉쳐져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겨울이 가고 곧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거리에는 개나리가 피었고 벚꽃이 만개했다. 4월이 되면 나이 먹음 같은 건 모르겠고, 나는 소풍과 운동회의 시즌을 맞이하며 뛰놀기에 바빴다. 그렇게 바삐 놀다가 중학교에 올라갔다. 교복을 입었고 이제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내가 올려다보던 중학교 형 누나들이, 이제 ‘내’가 된다니. 긴장과 함께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갔다. 가족들 몰래 교복을 입고 거울을 보며 우쭐했다. ‘짜식!’
3년이 훌쩍 흘렀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고등학생 때는 이제 진짜 어른이라고 생각하며, 거리를 활보했다. 돌아보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올라갈 때마다 새로운 다짐을 했던 것 같다. 그건 느낌만 조금 다른 대사였지, 결국 같은 뜻을 품고 있었다.
‘이제 잘 해야지! 새 술은 새 부대에!’
어째 매년 다짐만 해온 것 같다. 새해가 되면 으레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새해는 덤덤해졌다. 뭐랄까, 마음이 시들해진 것 같다.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이, 야채가 시들어가는 것과 같은 건 아닌데, 왜 나는 시들함은 물론 지루함에 시달리게 된 걸까. 그건 아마도 대학교 졸업 이후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인 것 같은데, 더 이상의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솔직해져 볼까. 나이를 먹으면서, 타인과의 대화 주제가 서서히 바뀌어왔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어제 본 TV 애니메이션에 대해 얘기했다면, 대학교 때는 어느 수업이 학점을 잘 주는지, 취업에 관한 대화를 했다. 사회생활을 하는 요즘에는 경제적인 것에 관한 대화가 주를 이룬다. 이때 변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대화에서 드는 불쾌함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가족,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또는 아무개와의 대화에서 대화 상대에게 기분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주제 자체에서 오는 불쾌감이다. 생활이라는 게 언제나 마음만큼 넉넉지 않은 지라, 대화를 하다보면 돈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면 줄줄이 소시지로 부동산, 주식, 로또 같은 한탕주의가 득시글거리는 단어들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부동산, 주식, 복권 등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이 대화 속에서는 늘 미묘한 부러움 같은, 시기의 마음이 깃들어 있기에 불편하다. 누구는 그랬다더라, 어디서 보니까 그랬다더라, 누구는 대박났다더라, 누군지 도통 알 수 없는 그 많은 ‘누구’는 계속 우리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리고 그 끝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늘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다음과 같은 소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도 대박나고 싶다.”
사실 나도 알고 있다.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알면서도 휘둘리게 된다. 경제란 것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인데, 내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걸까? 참 어렵다. 누군가의 대박 신화를 듣게 되면, 대세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
눈 결정체는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각기의 고유한 무늬가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각기의 고유함이 있다. 문제는 암묵적인 사회적 조장이다. 나는 태어났고 소중하게 자랐다. 한국 사회 안에서 내 나름의 목표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선택을 하고,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향해 나아갔다. 나는 그럴 자유가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저 경제적인 것만 집착하게 한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돈이라는 것은 필수불가결이라는 걸 부정하진 않는다. 맞다. 그러나 반문하자면, 경제적인 것이 다이고, 최고이자 최선인가? 생래적으로 우리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러니까 직시해야한다.
어느 순간부터 사회는 경제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출 것을 종용하고 있는 듯하다. 사회 경제는 무엇이든 숫자로 치환하기를 좋아하는데, 매번 OECD 기준, GDP 기준... 숫자와 그래프를 대동한다. 그럼 나라는 사람의 가치 기준도 그럴까? 가령, 눈을 보고 느끼는 설렘도 OECD 기준으로 줄을 설 것인가? GDP 기준으로 순위를 따져볼 것인가? 설렘은 내가 느끼는 ‘설렘’ 그 자체이지 수치화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것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성이다. 그러니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해야한다.
사회의 은근한 부추김 앞에서, 나는 내가 만든 새하얀 눈송이를 떠올려 본다. 손이 시려도 또 만들고 만들던 눈송이. 나는 눈송이로 무얼 하고 싶었던 걸까. 달리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좋아서, 예뻐서였다. 그럼, 다 자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건 무엇을 위한 걸까. 나는 무엇보다 나의 만족이 중요하다고 본다. 만족감. 이것은 내가 성취했을 때 온다. 삶이 지루하고, 겨울 입김처럼 흩어지는 것만 같다면 그건 목표 설정이 없어서이다. 불편함이 피어난 이유는 나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내년에도 달라지지 않을 거야. 그렇고 그런, 또 한해가 될 거야. 빤한 생각이 앞섰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다시 눈을 뭉친다. 다가올 신년에는 나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고대하고 또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