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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BOYOUNG Nov 06. 2022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이후의 마음

  10 29 이태원 참사 이후의 마음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로 유명을 달리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0월 29일 토요일, 제 친구는 이태원에 있었습니다. 저는 원룸에 혼자 누워 낄낄거리며 유튜브를 보고 있었습니다. 0시 무렵, 카톡이 울렸습니다. 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이태원에 간 친구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카톡을 보며 뒤늦게 이태원의 상황을 알았습니다. 인터넷엔 속보가 쏟아졌습니다. 수십 명이 압사 사고를 당했다고 했습니다.

  이태원에 간 친구와 연락이 닿았고, 저는 그를 데리러 갔습니다. 삼각지 역에서부터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습니다. 제각기 분장을 한 사람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저는 친구를 차에 태웠습니다. 원룸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뉴스 속보는 이어졌습니다. 사상자 수는 점점 늘어났습니다.

  씻고 불을 끄고 누워 다시 뉴스를 보았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용산 소방 서장의 브리핑을 보았습니다. 그는 떨고 있었습니다. 저는 잠이 오질 않았고, 새벽 동이 틀 무렵이 돼서야 겨우 잠들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눈을 감으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제 마음에는 여러 가지 심정이 뒤엉켜 있습니다. 슬픕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도와주지 못한 미안함도 있습니다. 한편,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며 동시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친구가 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제가 혐오스럽습니다.

  10월 30일 일요일부터 11월 5일 토요일까지 국가 애도기간이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5일부터 애도기간이 끝났는데,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도(哀悼)는 슬픔을 마음에 담는 것이 아니라 보내는 것인데, 그러니까 고인을 떠올렸을 때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 앞에서 담담해지는 것인데, 애도 기간 동안 마음은 진정되기는커녕, 더 어두워졌습니다.

  희생자들을 보낼 수 없습니다. 비극 앞에서 충격이 가중된 것은 압사라는 믿을 수 없는 사인 때문입니다. 1제곱미터에 9명 이상이 되면 압박감을 느낀다고 하는데, 이런 압박 경험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도, 참사 희생자들을 쉽게 애도할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감히 압박의 감각을 상상해 보면서 말한다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수시로 압박감이 떠올랐고 그때마다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런 제 스스로가 무섭고 또 고인에게 미안합니다.

  저는 엘리베이터에서 압박의 경험이 있습니다. 이대로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겹겹이 엘리베이터에 탔고 정원을 초과한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는 작동했습니다. 그때의 장면과 공포의 느낌이 오버랩됩니다.

  저는 친구들과 셋이 봉천동 원룸에 산 적이 있습니다. 출근 시간에 서울대입구역에서 꾸역꾸역 지하철을 탔습니다. 숨이 턱턱 막혔지만 지하철을 놓칠 순 없었습니다. 저는 제 시간에 알바를 가야만 했습니다. 출근 시간의 신도림역을 지나는 경험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잠실 원룸에서 셋이 산 적도 있습니다. 아침마다 자고 있는 친구를 타넘고 씻고 옷을 입고 부랴부랴 원룸을 빠져나왔습니다. 때로 친구가 서둘러 나가는 소리를 가만히 듣기도 했습니다. 구둣발 소리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언제쯤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생각하곤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 1평 남짓한 공간을 두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갑갑한 마음을 보듬을 여유가 없어서 종종 저는 취하곤 했습니다. 누구는 비틀거리는 저를 향해 비난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비난한 자는 모릅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원룸 같은 저의 마음을요. 술을 마시고 취하는 것의 정당화가 아닙니다. 그때 왜 술을 마시고 왜 취하게 되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늘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마음 깊이 가중되고 있던 현실의 압박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저는 참담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참사 희생자 중에는 특히 젊은 사람이 많습니다. 젊음이란 그때만이 가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시절의 특권인데, 지난 몇 년간 지금의 2,30대는 그 특권을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젊은 시절의 한 챕터가 마스크에 가려진 것입니다. 올해 겨우 거리두기가 풀렸고 젊은이들은 이태원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동안 쌓인 심리적 가중을 풀어헤쳤습니다. 모처럼 해방감을 느끼며 한 시절을 만끽했습니다. 그런데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보고 몇 몇 사람들은 시답잖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거기를 왜 가냐’, ‘간 사람이 잘못이다’, ‘술 먹고 놀다가 죽은 걸로 유난이다’ 등의 말을 내뱉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젊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이를 떠나 젊음이라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자유와 권리로 치환해본다면, 누구나 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냉각된 듯한 이들은 일생에서 단 한 번도 즐거움을 느껴본 적이 없는 듯 합니다. 젊었던 적이 없는 듯 합니다. 아마도 노는 것에 대한, 핼러윈이라는 외국 문화에 대한, 술이라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단선적으로 작동했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나는 즐기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시샘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이라는 젊음을 즐기는 것이 비난 받아야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특히나 다 같이 코로나라는 긴 터널을 지나 온 때를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도 참사를 믿기가 어렵습니다. 믿고 싶지 않습니다. 요즘엔 어디선가 큰 소리가 나면 놀란 마음으로 주변을 살핍니다. 주변 사람에게 연락을 했는데 금방 연락이 닿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이태원. 그날 그 순간 그곳에 저는 없었지만 저는 있었습니다. 저는 살았고, 제 안의 저는 텅 빈 골목을 자꾸 서성입니다. 좁은 골목길에 서 있는 저는 마음이 도려내진 것 같습니다. 감히 위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비탄의 마음을 나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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