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EMPRE Dec 23. 2021

[에세이] 유치원 놀이터 기억

우리 세 가족은 경남 김해에 자리를 잡았다. 그 당시 그 곳에 새롭게 세워진 붉은 벽돌 교회는 3층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엄마가 운영하기로 한 어린이집은 교회 3층, 우리집은 1층 목사님 가족 사택 옆집, 그리고 2층이 예배당. 우리 세 가족이 뭐가 그리 대단했는지 몰라도 목사님은 그리도 특혜를 주었다.

 일찍이 어린이집(정확히는 선교원)을 운영하기로 한 엄마는 원아들을 위한 원복을 맞추었다. 엄마를 따라 부산 서면인가 '시내'라는 곳에 어린이집 봉고차를 타고 가서 원복 원단도 보고왔다. 엄마 눈에는 감귤색 줄무늬가 예쁘게 보였다. 거기 1호 원아인 나도 그 옷을 입었다.
 
 어린이집엔 곧 몬테소리 장난감도 들어찼고, 인형극용 인형도 한 편에 진열되었다. 엄마는 인형 만드는 재료를 사기 위해 종종 서면으로 갔는데, 나를 데리고 가곤 했다. 아마 화상이었을 것이다. 그곳은 매캐한 신비를 품은 곳이었다. 지금도 꿈에 나온다. 나이든 주인이 있고 갖가지 도구와 분필과 군것질거리와 장난감과 하여튼 그런 걸로 가득 찬 곳. 하지만 무엇보다 돌아오는 길에 사주는 롯데리아 불고기버거가 좋았다.

 인형극용 인형을 원하는 때 언제든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게 원장 아들로서 천국과 같은 특권이었다. 너무 황홀했지만 그렇게 혼자 노는 건 생각보다 빨리 지루해졌고 재미도 없었다.

 교회 앞에는 우연히 딸린 놀이터가 있었고, 우리는 사실상 무단으로 그 곳을 우리 어린이집 전용 놀이터로 사용했다. 모래더미엔 누가 먹다 버린 족발 뼈다귀 같은 것들이 반쯤 묻혀 있는 그런 곳이었다. 당시엔 별 이름도 없는 조그마한 놀이터였지만 지금은 별로 귀엽지도 않은 김해시 마스코트가 박힌 '푸른공원'이라는 팻말이 붙었다.

 해가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조그마한 놀이터 맞은 편에 야속할 정도로 커다란 유치원이 들어선다. 노랫가사에 나오는 마법의 성 같은 곳. 하나하나 만들어 질 때마다 사악한 마법이 실현되듯 엄마는 속상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내 기억 속에 그 곳은 햇볕을 빼앗고 우리의 조그마하고 보잘 것 없는 놀이터에 그늘을 만들었다.

 지금도 그 동네에 가면 새하얀 유치원이 버스정류장 너머로 거대하게 보인다. 서양풍 성벽을 흉내낸 지붕 아래 유치원 박혀있고, 그 아래엔 또렷한 글자로 "Since 1997"라고 쓰여있다. 지금보니 조금은 촌스럽구나.

 그만큼 크게 보이지는 않지만 엄마가 생존해 보려 했던 몸부림, 어린이집을 했던 흔적도 기적적으로 흐릿하게 남아있다. 나도 어른이 되어서 그 동네를 몇 번이고 되찾아 오다 뒤늦게 발견한 흔적으로, 교회 3층 창문에 낡은 스티커들이 조금 남아있다. 아마 아직 있을 것이다.

 새로 세워진 유치원엔 웅장하고 거대하고 알록달록한 놀이기구들로 즐비했다. 화사한 인조잔디도 있었다. 원칙적으로 그곳 원아가 아닌 이상 들어갈 수 없었고 울타리는 야속하게도 알록달록하면서 높았다. 단단한 목재로 된 정문으로 입장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체구가 작았던 나와 우리 어린이집 아이들은 어른들 눈을 피해 울타리 틈새를 뚫고 제비처럼 짧게 그곳을 훑고 놀이기구를 맛보고 돌아오곤 했다. 배덕감과 함께 금단의 영역을 헤매는 기분을 느꼈다.

 그곳의 채도가 밝은 놀이기구 위에 올라서면 자기 스스로 마치 바이킹이나 왕족이라도 된 기분이 들 터였다. 그렇지만 그 곳 유치원 아이들이나 어른들 눈에 띄면 도망칠 준비나 해야 하는 신세가 제대로 된 왕족의 처지일리 없었다.
  
 누군가는 아무런 불편함 없이 누릴 수 있지만 우리는 누릴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모든 것은 불평등하지만 상상력마저 불평등한가? 과연 마음껏 공간을 누린다는 건 무엇인가하는 원초적 의문을 그 당시에 일찍이 품었다면 좀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그 기억을 간직한 채 살아오는 동안 차츰 잠재의식 속에 자리잡았다.

 근자에 부근 못 사는 아파트 아이들이 놀이터에 들어올 수 없도록 막는다는 고급아파트 이야기를 들으면 느끼게 되는 가슴이 끓는 감정이 이 때문인 것 같다.

 그 유치원은 우리 가족에게 잇몸에 낀 가시와 같았다. 아니 사실은 우리가 가시인데, 커다란 이빨 사이에 껴서 옴싹달싹 못하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IMF 무렵에 원아의 일부는 그 커다랗고 화려한 유치원에 빼앗겼고, 일부는 돈이 없어 더 이상 어린이집을 다닐 수 없었다. 사람 좋은 우리 엄마는 그냥 몇 달 공짜로 다니게 했다.

 초가을 내 생일에 우리 가족은 지코바 치킨을 두마리 시켜 교회 앞 화단 앞에 앉아 목사님 가족과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해가 지나 누나 생일엔 이 동네에선 제대로 구경하기도 힘든 눈이 내렸다. 그 무렵 누나 얼굴엔 마른버짐이 피었고, 젊은 엄마는 그 꼴을 본 외할머니에게 크게 혼나고 만다. 해 코스모스 필 무렵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작가의 이전글 [에세이] 옥탑방, 고양이 퇴치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