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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제 May 18. 2024

알사탕만큼의 세계

사랑하는 사람과 비슷한 점이 다만 몇 가지 있다는 사실은 이렇게 불평을 함구하게 한다.


언론사 기자와 만나는 점심 미팅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나의 주 업무 중 하나다. 12시 약속을 앞두고 11시 즈음 어플로 잡은 택시의 도착 예정 시간은 11시 45분.


'같은 서울끼리도 이렇게 멀구나'


직장 생활 5년 차에도 적응이 안 되는 서울의 광활함을 거듭 체감하며, 미팅에 동행하는 동료가 자기 몫의 업무를 바삐 쳐내는 동안 잠시나마 해를 쬐고자 먼저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사무실에서 때 이른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해서인지, 바깥세상은 유난히 따듯하고 느긋해보였다. 와이셔츠 차림의 회사원들이 태우는 담배 연기마저 슬로 모션을 건 듯 했다.


희소하게 볕이 좋은 날이라, 고개를 한껏 젖히고 차가운 볼에 해를 쬐어주었다. 유리창을 통해서가 아닌 피부로 맞는 날씨의 변화는 훨씬 생생했다.


'띠링' 택시 도착 알림에 고개를 쭉 빼고 왼쪽 도로를 살펴보지만 승용차만 몇 대 지나가고 만다.


기사님께 전화를 걸까 싶던 찰나 일을 마친 동료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그제야 주황색 택시 하나가 다섯 발짝 정도 뒤에 엉거주춤 멈춰 섰다.


"안녕하세요-"


백미러로 눈인사를 건네시는 기사님은 언뜻 봐도 엄마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셨다. 중노년의 여성기사님이 모는 택시라니, 이 또한 희소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45분간 셋의 동행이 시작됐다. 아니 50분, 아니 55분... 강남까지 가는 길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막히는지 자꾸만 늘어나는 도착 예정 시간에 마음이 급해졌다.


꼭 우리 할머니같은 빠글 머리에 엄마같이 왜소한 기사님이 내 반응을 읽고 덩달아 조급해질까 신경을 쓰다가 도착 예정 시간이 결국 20분이나 늘어난 것을 확인하곤 근심이 재채기처럼 튀어나와 버린다.


큼, 목을 가다듬고 뵙기로 한 기자님께 전화를 걸어 좀 늦을 것 같다고 가만가만 이야기하는 동안, 기사님의 빠글 머리가 분주히 옆차선을 살피는 것을 눈치채고 만다.


꽉 막힌 도로 상황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으시는 기사님의 혼잣말인듯 아닌듯한 말에 어디까지 대꾸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 울렁, 차멀미가 올라온다.


에라 모르겠다 뒷좌석 시트에 머리를 기댄다. 순간, 기사님 어깨 너머 운전석 왼켠에 너무나 완벽한 구도로 구비해 둔 기사님의 '삶'을 발견한다.


종이컵보다 조금 더 크고 넓은 플라스틱 컵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고 그 안에는 아주 얇은 롤빗과, 은수저, 일회용 플라스틱 포크, 네임펜, 빨대 등이 딱 하나씩만 담겨있었다. 가장 위에는 나무 구슬이 알알이 엮인 묵주가 기사님의 생을 보호하듯 우직하게 걸쳐져 있었다.


멀미도 잊고 그것들을 관찰하는 동안, 어느덧 차는 움직이는 걸 넘어 드디어 달리기 시작했다.


바쁜 손님을 태우고 진땀을 뺐을 기사님은 반가운 빨간불을 만나 잠시 정차한 새, 뽀시락- 알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쏙 넣는다.


숱하게 점심 미팅을 다니며 숱한 택시를 타봤어도 기사님이 입에 쏙 알사탕을 넣는 순간을 목격한 적은 없었는데, 언제나 어디서나 필요한 모든 것을 구비해 두는 우리 할머니와 엄마가 떠올라서 웃음이 났다.


여자란 대체로 아기자기하고 귀엽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잘 돌보는구나. 누군가를 잘 돌보아본 이력 때문인 걸까.


알그락 알그락, 사탕이 입 안에서 부딪히는 소리는 나른한 이동 시간 내내 유일한 배경음이 된다. 사탕 굴리는 소리만 가득한 택시 안에서 동료와 아무 말 않는 시간은 낯설었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쌩쌩 달리는 차량들 사이에서 꿋꿋이 적정 속도를 지키는 기사님을 맘 속으로 보채다가도, 뭐든 안전 제일을 외치며 본인은 자주 넘어지고 데이는 엄마가 생각나 그마저 거둔다.


사랑하는 사람과 비슷한 점이 다만 몇 가지 있다는 사실은 이렇게 불평을 함구하게 한다.


알그락 알그락,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녹지 않는 사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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