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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여행 Oct 09. 2022

내 마음의 반을 가져 가버린 아바나

쿠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

나에게 쿠바는 음악이다. 말레꼰을 부숴버릴 듯 부딪쳐오며 스스로 부서지는 하얀 파도를 배경으로 깔리는 ‘Chan Chan(찬찬)! 스트로크 주법으로 치는 어쿠스틱 기타와 젬베의 리듬에 이어지는 고음의 트럼펫 선율을 듣는 순간 코끝이 찡해오며 근원을 알 수 없는 설움이 목 아래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쿠바 음악은 마치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을 현란한 리듬과 비트로 덮은 뒤 슬프지 않은 척하는 느낌이다. 감추려 덮어 놓은 현란한 리듬을 걷어내고 슬픔을 보아 버린 벌이라도 받는 듯,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생각만 해도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Son(쏜)이라 불리는 쿠바 음악의 배경을 알고 난 뒤 음악이 가지는 힘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사람을 울릴 수 있는 힘. 그렇게 난 쿠바를 만나기도 전에 이미 쿠바 음악에 나의 영혼을 빼앗겨버렸다.



멕시코에서 만난 여행자들은 다음 여행지가 쿠바라는 말에 자신이 만난 쿠바를 이야기한다. 호불호가 강하다. ‘호’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불호’인 사람마저도 매력적이라는 말은 빼놓지 않는다. 단지, 다시 가고 싶지는 않다는 말을 덧붙인다.

쿠바를 다녀온 여행자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물건 특히 먹을 것이 부족하니 간식을 넉넉히 준비해 가라고. 더불어 그 간식들이 공항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하기를 바란다는 기원도 빠뜨리지 않는다.


멕시코를 다녀오는 쿠바노들은 마치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할 물건을 사 오는 도매상 같다. 쿠바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 멕시코로 나온다는 말을 들었기에 생긴 선입견일 수도 있다. 멕시코에서의 성공적인 쇼핑에 대해 이야기라도 나누는 것일까, 시끌벅적 비행기 안이 활기차다. 여행하는 동안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으나, 자유분방해도 너무나 자유분방한 옷차림에 여전히 깜짝깜짝 놀란다. 흑진주 빛깔의 피부에 레게머리를 높게 묶은 관능미 넘치는 쿠바 여인의 핸드폰이 꽂혀 있는 곳에 눈이 가는 순간, ‘아이구야!’ 나도 모르게 낮은 탄식이 나온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을 했으나, 긴장된다. ‘사회주의 국가’라는 말이 주는 무게와 어둠이 덮고 있는 ‘밤’이라는 시간이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호객 행위를 하는 쿠바노에게 떠밀려 택시를 타러 가며, 머릿속 수많은 정보들 속에 택시를 타는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택시 요금이 떠오른다. 우리가 합의 본 요금과 지금 택시를 타러 가는 장소가 일치하지 않는다! 쿠바에서의 신고식이라 생각하자.


아바나의 첫새벽 산책에서 돌아온 남편은 상기된 표정이다. 말레꼰을 보았다고, 말레꼰의 그 파도를 보았다며 흥분한다.

숙소가 있는 올드 아바나 오비스포 거리에서 캄피톨리오 광장으로 걸어가는 길은 그 자체로 훌륭한 여행지다. 건물을 뚫고 나오는 라이브 음악에 몸을 흔들어 대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다. 온 거리에 춤과 음악이 넘쳐흐르고 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유럽풍의 건물들은 그 자체로 멋스럽다. 보기에 따라서는 지저분하고 위험해 보일 수도 있으나, 쿠바에 대한 객관성을 잃은 나의 눈에는 모든 것이 매력적이다.




캄비톨리오 광장에 들어서자 태양 빛을 받은 ‘올드 카’들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보닛을 열면 엔진의 상태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겉모습은 우리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올드 카’ 1시간을 타는 비용은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30쿡(30달러 정도임) 전후가 적당하다고 한다. 우리가 고른 ‘핑크빛 올드 카’ 기사는 하얀색 셔츠에 하얀 파나마모자를 쓴 멋쟁이 젊은 쿠바노다. 기사는 사람이 넷(혼자 여행 중인 아저씨와 함께 올드 카를 탔다)이니 40쿡을, 우리는 30쿡을 제시하며 흥정을 한다. 갑자기 딸아이가 기사를 보며, “Treinta CUC, Por favor~(30쿡 해주세요. 제발)”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깜짝 놀라며 아이를 쳐다본다. 어설픈 영어로 흥정 중인데, 아이가 에스파뇰로 말한다. 기사는 놀랍고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OK! 네가 에스파뇰로 이야기해서 해주는 거야. 30쿡은 네 덕분이야!”


올드 카가 움직인다. ‘음악만 있으면 금상첨화인데......’라는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젊은 올드 카 기사가 오디오를 켠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 우리를 태운 올드 카는 영화 속으로 들어간다. ‘미칠 것 같이 좋다!!!’

‘올드 카’는 캄피톨리오 광장을 출발해 혁명 광장으로 간다. 체 게바라의 얼굴과 까밀로 씨엔푸에고스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건물이 눈에 확 들어온다. 올드 카 기사는 에스파뇰로 이야기 한 딸아이가 신기한지 계속 말을 건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에스파뇰은 아주 기본적인 생존 회화와 숫자가 전부인데,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다. 딸아이는 여행 오기 전 에스파뇰로 숫자만 외워왔는데, 그게 신의 한 수였다. 어딜 가나 돈 계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옆을 봐봐!”라는 남편의 말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을 의심한다. 짙은 남색 잉크 빛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짙은 남색 때문인지 말레꼰에 부딪히는 포말의 하얀색이 더 두드러진다.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말레꼰을 따라 올드 카가 달린다. 그 위로 쿠바 음악이 흐른다!












입구에서부터 발 디딜 틈이 없다. 빈자리를 찾아 눈을 열심히 돌린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밴드 소리.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대표 곡인 'Candela'다. 이곳은 헤밍웨이의 ‘다이끼리’ 맛집, Flordita(플로리디따)다. TV 여행프로에서 배우 류준열이 찾아가서 한국 여행자들에게도 유명해진 곳이다. 헤밍웨이는 바 테이블 왼쪽 구석에 앉아 우리를 보고 있다. 남편은 헤밍웨이의 ‘다이끼리’를 나와 아이는 ‘무알코올 모히또’를 시켜본다. 쿠바에서의 첫 ‘모히또’다. ‘모히또’는 사랑이다. ‘모히또에 가서 몰디브 한 잔’이 아니라, ‘모히또에 가서 쿠바 한 잔’으로 영화 대사를 바꾸고 싶다.



아바나를 다니다 보면 가게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피자 가게 앞에도,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도, 와이파이 카드를 파는 가게의 줄은 특히 길다. 그렇게 늘어선 줄을 따라, 1 CUC에 산 아이스크림 맛이 나쁘지 않다(저녁에 같은 숙소 여행자에게서 아이스크림을 24배 비싼 가격으로 샀다는 말을 듣고 살짝 흥분했다.).

우리 집 옆 골목엔 헤밍웨이 모히또 맛집이 있다. La Bodeguita Del Medio(라 보데기따 델 메디오). 헤밍웨이 맛집 덕분에 이 골목은 늘 사람들로 넘쳐난다. 모두들 모히또 잔을 손에 들고 가게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가게가 작아 안에 앉아 마실 엄두를 낼 수는 없다.)






이제 이 골목은 나에게 더 이상 헤밍웨이 모히또 맛집이 있는 골목이 아니다. 이 골목은 나의 단골집이 있는 골목이고, 내 친구의 직장이기도 하다. 쿠바에 온 뒤로 ‘1일 3 모히또’를 하기에 나도 ‘라 보데기따 델 메디오’의 단골 자격이 충분히 있고, 그 가게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거리의 화가는 나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처음 거리의 화가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단호한 표정으로 "NO"라고 말했다. 그 친구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한참을 지켜보던 나는, “나도 그림을 그린다.”라고 말했다. 표정이 부드러워진 거리의 화가는 나의 드로잉 북을 보며 활짝 웃었다. 이렇게 친해진 거리의 화가는 나에게 사진을 찍는 것을 허락했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서로를 응원하는 사이다.

바쁠 것이 없어 느릿느릿 올드 아바나 주변을 다니다 시장에 들러 장을 보고 숙소로 향한다.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쌀알 하나하나 살피며 썩은 쌀을 고르고, 갓난아기 새끼손톱만큼 작은 마늘을 깐다. 딸아이는 피곤한지 낮잠을 자고, 다른 여행객들은 시내 투어를 나가고 남편은 카메라를 들고 또다시 말레꼰으로 갔다. 조용하다. 학교로, 직장으로 간 가족을 기다리며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가 된 듯하다. 여행이 일상이 되는 순간이다. 여행이 일상이 되기를 바라왔기에, 썩은 쌀이 쌓이는 이 순간조차도 감사하다.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말레꼰으로 간다. 아침노을과 저녁 석양을 배경으로 서있는 모로 요새를 보며 매일 감탄하다. 딸아이는 말레꼰을 덮치는 파도와 한참을 논다. 집에 가자는 소리에 아쉬워 바다를 본다.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 ‘파도야 놀자!’가 오버랩된다. 어쩌면 우리는 배낭을 메고 세계를 향해 떠나온 가족이 주인공인 동화 속 주인공인지도 모르겠다. 매일이 동화 같은 이곳은 아바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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