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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mpo Primo Aug 06. 2019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고, 2016년 3월에 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의 판권 일자가 2010년 7월 30일이니 최소 5년 전에 구입한 책일테고, 2013년에 받은 저자의 서명이 간지에 쓰여 있다. 몇 번이나 읽었을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이 좋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잠깐 집밖으로 나왔는데 날씨가 좋기에 공들여 씻고 꼼꼼하게 화장을 하고 나와 무작정 지하철을 탔다. 여의도 공원으로 가서 강뚝에 앉아 책을 읽고 싶기도 했고, 익숙한 합정 카페에 오래 앉아 있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경복궁 역에서 내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행선지였다.



사실은 입장권을 사서 경복궁을 한 바퀴 빙 돌아볼까 했는데, 사람이 많길래 그만두었다. 잠깐 매표소 앞에 서서 고민을 하다 서점으로 향했다. 별 일이 없는데도 늘 의경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주한미국대사관 앞을, 해고 노동자들의 플랜카드가 걸려 있는 KT 앞을 지나 교보문고에 갔다.



익숙한 책들 사이에서 몇 권의 책을 골랐다. 책을 고르는 데에는 그닥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문서 세 권과 다음에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에세이 한 권을 샀다. 지금 나에게 문학은 너무 무겁고 에세이는 너무 가볍다. 그렇다면 차라리 가벼운 쪽을 고르는 것이 낫다.



고른 책들을 결제하고 서점을 돌다가 보니 답답해서 벗어 가방에 걸쳐두었던 겉옷이 없었다. 언제 기척도 없이 떨어진 걸까. 근처에서 바쁘게 책을 정리하던 직원에게 물으니 안내 데스크로 가보라고 했고, 다행히 거기서 옷을 찾았다. 오늘의 멍청한 짓이다.




서점을 나와 청계천을 따라 걷다가 적당한 카페를 찾아 들어가려고 했는데 귀 따가운 EDM이 꿍꿍 울리고 있었다. 이런 노래밖에 틀 수 없는 걸까 고민하다 발걸음을 돌렸고, 교차로에서 빅이슈 한 권을 사서 스타벅스에 갔다.



적당히 조용한 자리를 찾아 커피와 짐을 내려두었다. 나올 때 챙긴 책을 포함해서 총 여섯 권의 책이 있었다. 원래 읽기로 한 책을 읽는 것이 나을 것같아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이것이 오늘 내가 다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게 된 경위이다.





책을 넘기다 보니 여기저기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언제 그은 밑줄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깨끗한 책을 사서 읽었어도 밑줄을 그었을 법한 문장들이었다.



문장 하나하나를 되새겨 읽으며 몇 개의 밑줄을 더 그었고, 이전의 밑줄과 연관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는 쪽수를 적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굳이 적지 않았다. 다음에 읽을 때에도 나는 그 문장들에 밑줄을 긋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시간 정도 쉬지 않고 앉아서 완독했다. 일전에 저자가 이 책은 1년에 천 권 정도의 책이 팔린다며, "아마 나를 파괴하고 싶은 사람들이 1년에 천 명쯤은 있나봐요." 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해도 파괴하고 싶지 않다. 이런 저런 감정으로 나 스스로를 좀먹게 두고 싶지도 않다. 책을 읽으며 나는 차라리 뛰어난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은 예술가의 지상 덕목이다.(8p)



하지만 나는 두렵다. 책에도 두려움에 대한 몇 개의 구절이 있었다.



"두려움은 흔히 혐오의 외피를 쓰곤 하죠. 자전거를 배우려면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해요. 그리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면 돼죠." (108p)



"나는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었어. 이제 페달을 힘차게 구르기만 하면 어디로든 가버리겠지." [중략] "그런데 넌 아니었어." (123p)




나에게 하는 말인 것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 나의 두려움도 그 외피를 쓰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만, 나는 어느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하는지 모른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내 자전거는 작은 덜컹거림에도 금세 쓰러질 것 같고 섵부른 판단이 나를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구원일 수는 없어요." (133p) 결국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은 나다.




리뷰를 가장한 내 하루에 대한 글을 어떻게 끝맺음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내가 왜 이런 속풀이에 가까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던지고 눈을 감아야겠다. 잠을 자는 순간에는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 한숨 자고 나면 뭔가 정리되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이 머리속에 울린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134p)








2016년 3월에 쓴 독후감을 이곳에 다시 옮겨 봅니다.

지금은 현생에 치여 저 정도로 깊게 고민하며 살지는 않지만, 저때는 제 인생의 가치관을 새로이 정립해 나가고자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저 미숙하던 시절은 지금의 제가 되는 데 많은 자양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고 유치한 고민들이지만요.

벌써 3년 전의 글이라 제 글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내용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다'는 책의 구절에는 공감합니다.

우리는 종종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해 하고, 멀리 떠나야만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물론 일상의 고민이 많은 공간에서 벗어났을 때, 즉 '나의 파괴'로부터 오는 리프레쉬는 정말 소중한 것이고, 그것에서 새로운 가치관이라던가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삶은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멀리 떠났다 하더라도 나는 결국 나고, 결국은 다시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니체의 '영원으로의 회귀'가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니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 지금 니체와 연결시켜보니 책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니체는 이 '영원으로의 회귀'라는 개념을 주장하며, 영원이라는 시간은 원형이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말합니다. 니체는 신도, 환생도 부정하던 인물이므로 다음 삶에서의 새로운 인생도 부인했습니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고 즐겨라, 그것 또한 너의 의지이고 선택이다'라는 "아모르 파티"가 바로 여기서 나온 개념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니체의 사상을 이 글에 투영시키면, 결국 죽음을 의뢰한 이 책의 인물들은 죽음으로도 삶의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되겠네요. 죽음이라는 가장 먼 도피처로 떠나더라도 변하는 게 없어요, 인생이란.

그렇다면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쉬이 내리기는 어렵지만, 고통스러운 순간일지언정 나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이니 순응해야 한다는 니체의 주장은 현재 저의 인생관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글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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