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 인구 감소' 시작됐다. 사망자 수가 출생자수를 앞지른 '인구 데드크로스'현상이 최초로 발생한 날
커피가 목에 걸린다.
아침식사를 하며 지난 연말까지 내내 코로나 속에 전대미문의 갖은 고생을 다하며 막 입시를 끝낸 둘째가 입을 연다.
"엄마 뉴스 봤어요? 와 연휴 끝나니까 또 코로나 확진자 천명 넘음. 근데 정인이라는 불쌍한 아기는 왜 죽은 거야?
입양한 양부모가 그랬다면서요?? 엄마 나말이예요. 결혼은 할 건데 애는 안 낳을 거예요! 아 놔 이런 세상 보여주기 진짜 미안하다고요"
이참에 꼭 엄마에게 말을 해두어야 겠다는 아들의 의지가 보인다.
나는 거의 흡사 죄인 얼굴이 되고 갑자기 아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새벽 배송으로 배달된
라코타 치즈 샐러드 4500원짜리를 입에 넣다 말고 내 접시만 응시했다. 할 말이 없었다.
내입엔 그래도 음식이 들어가고 아들의 한탄은 이어지고, 다음 스케줄을 걱정하는 나의 일상도
계속되는 것이 조금 야속해지는 그런 인생의 맛을 느낀다.
"얘야 나는 뭐 너에게 이런 세상을 보여줄 줄 알고 너를 이 세상에 초대했겠느냐? 그래도 너 어젯밤에 신년 가족회의 때 그랬잖아. 현재 내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너는 행복하다고 말했잖아. 지금의 삶이 좋고 만족스럽다고. 그니까 결국 행복은 환경과 상관없이 본인에게 달려있는거 아닐까나?
(우리 가족은 매주 일요일 저녁 가족회의를 하는데, 어제는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각자의'신년 계획 발표'를 했던 날. 가족 시무식 같은 것이다. 미리 내가 오프닝 질문들을 준비했었는데 첫 번째 질문이 바로 그거였다.)
아들, 하룻밤도 안 지나서 너무 그러지 말고 애 낳고 안 낳고는 지금 결정해야 하는 거 아니니까 일단 알겠어. 너무 흥분 말고. 엄마 마음속에 접수는 해둘게"
이제는 다 식어버린 남은 커피를 들이켜다 말고 아들의 "나 결혼은 할 건데..!"라는 말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엄마 아빠가 재미나게 사는 거 보니까 나도 결혼은 하고 싶어요. 뭐 가능한 한 빨리 할 거야" 두 아들은 이런 말을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 얼굴엔 미소가 피어나고 감사했다. 주변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요즘 다 늦게 결혼하는 추세이고 비혼 주의자들도 많은데 아들들이 결혼을 빨리 한다는데 좋기만 하냐고. 맞다. 일단 나쁘지 않다. 우리 부부는 그저 자녀들이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은 것, 그것도 엄마아빠를 보고 자신의 인생에 영원한 솔메이트를 만났으면 하는 소망이 몽글몽글 생겼다는 것, 그리고 뭐 빨리하고 늦게 하고는 전적으로 본인들에게 달렸지라고 생각하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
지난 글에서도 밝혔지만 우리 부부는 양가의(특히 시댁 쪽의) 극심한 결혼 반대를 딛고 결혼한 커플이다. 결혼 당시 어떠한 지원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우리는 서울 변두리 반지하에 신혼살림을 겨우 마련했다. 인정받지 못하는 며느리라는 상처가 내면 깊숙이 자리했고 수시로 그 실체가 우리 부부를 공격했으며, 마음이 강하지도 못한 나는 자주 울었는데, 돈마저도 없었다.
지금의 행복이 더욱 기적같이 느껴지는 과거들이다. 아 그런데 그냥 기적이라고 하기에는 우리의 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억울해서 약간 설명을 해야겠다.
우리가 이혼 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격차이가
없고 서로 잘 맞아서일까?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라고 생각한 당신생각이 맞다.
윌리엄 글라써의 5가지 기본 욕구 이론(참고:책 욕구 코칭)을 보면 나의 남편은 안전과 생존의 욕구가 강한 사람으로 온 집안에 보이는 전기코드는 다 빼고 다니며, 수십 년째 다이어리를 꼼꼼히 적고 그대로 하루를 사는 것을 인생의 철칙으로 아는 사람이다. 계획되지 않은 즉흥적인 행동 특히 충동적인 일이나 구매같은 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헛된 꿈이나 괜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허황된 약속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지극히 극 현실적인 사람이다.
나는 이런 남편이 지루했다. (그러나 이런 남편 때문에 안 굶고 살았음을 인정)
나는 완전 반대다. 꿈꾸고 상상하고, 툭하면 일을 벌이고 저지르고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다. 기분파라 경제관념도 없다. 나는 즐거움의 욕구와 사랑과 소속의 욕구가 강해서 무언가를 배우러 다니고 가르치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며 사람을 워낙 좋아해서 인간관계에 치여 눈물 지을 때도 많았다. 남편이 보기에는 오지랖 여왕에 무계획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정. 말. 완. 전. 반. 대. 였. 다.
유행어가 떠오른다 "아 당신은 정말 나의 로또야~! 진짜 하나도 안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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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결혼생활에 있어서 몇 가지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만의 원칙이었고 그것에 합의하고 지켜나가는 것에는 마음의 쿵작이 참 잘 맞았다.
원칙 첫 번째는 '부모를 떠나자' 다.
결혼생활을 잘하려면 부모를 떠나라. 오해는 말라. 한국에서 떠나 이민을 가라거나 부모님을 찾아뵙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의사결정에 있어서 정신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매주 또는 매 월 두 번 이상은 부모님을 찾아갔었고 성인 자녀답게, 많진 않지만 평생 정기적으로 용돈도 드렸다.
하지만 단 하나 양가 부모님이 우리 부부 사이에 관련된 부분이나 자신의 손주들 즉 우리 자녀들의 일에 간섭하려고 하면 바로 선을 그었다.
웃는 얼굴로 야박하다싶게 말이다.
"저희가 결정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자식과 손주 잘되라는 마음으로 훈수와 조언을 하고 싶으신 마음은 이해하지만 언제나 그 내용이 건강하지도 않았고, 우리 부부의 삶의 철학이나 방향과도 맞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기대도 하지 않으시도록 우리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나는 며느리였고 겁이 많아 주로 침묵하는 쪽이었고 남편이 그 역할을 감당했다. 그게 가장 안전하니까. 물론 친정 쪽은 내가 맡았고)
언젠가부터 양가 부모님은 더 이상 깊이 간섭을 하지 않으셨는데,
그 관심이 동서네나 시누이들에게로 옮겨가서 그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아야만 했다.
결혼생활은 오직 부부가 결정하고 오직 부부가 만들어가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모습이어야 한다. 조금 부족하면 어떠하리 자식들도 멈추지 않고 성장 중이며 실수하면서도 계속 배우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고 기다리시라. (부모님들에게 드리는 말씀) 그것이 결국 진정한 효도요 그렇게 얻어진 행복은 값지다. 부부의 합작이므로 두고두고 자부심이 크다. 부모님과의 적정한 거리 두기! 행복한 결혼생활에 필수요소다.
원칙 두 번째 '돈이 없으면 창의적이 되자'
경제적인 이유가 결혼을 조각내고 행복을 너무 과잉 대표하고 있다. 경제력의 기준이 너무 높으니 행복의 만족도가 낮고 늘 부족하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돈을 적게 벌어오는 남편이, 돈을 안 벌고 살림만 하는 아내가 무능해 보인다.
우리는 신혼 때부터 돈을 항상 아껴 써야 했기 때문에 행복을 자주 느끼려면 필요한 것은 뭐? 창의적인 아이디어였다. 긍정적인 마인드 컨트롤은 필수였다.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 돈 때문에 블행해진다면 인생에서 지는 것만 같았다. 나도 두 아들이 초등학교때까지는 거의 수입이 없었던 경단녀였다. 남편이 빠듯한 생활비를 주면 그것을 주 단위로 나눠서 썼다. 아들들 옷도 거의 사본적이 없다! 그때 길러진 검소함은 기분파였던 나를 엄청나게 규모 있게 만들어주는 훈련이 되었다.
몇 년 전 내가 "자기야 나 상처있나 봐 나도 이제 다른 사람들처럼 돈 쓸 수 있는데 잘 못써. 밥도막 사고 싶고 옷도 사 입고 싶은데 돈 쓸 때마다 자꾸 마음이 쪼여들어. 이제 우리 그 정도로 못 살진 않는데 그렇지? 조금 슬프기도 해"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신혼 때부터 긴 시간 검소하게 살아야 했던 세월을 내가 잘 참아주어서 여기까지 왔다며 이제부터 매달 '품위유지비'를 따로 주겠단다. 아내의 품위유지비를 주겠다니! 아 얼마나 사랑스런 남편의 언어선택인가. 그걸로 내 품위가 유지되는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우리의 사랑과 의리는 깊이 유지되었다.
나의 강의 수입과 상관없이 남편이 주는 품위유지비는 크든 작든 지금도 매달 들어온다.
요즘 코로나로 나갈 일이 잘 없어서 그 돈이 조금 세이브되었을 때, 나는 그 돈을 남편 얼굴의 점빼기 등 피부관리비용으로 20만원을 내놨다. 내 남자의 피부는 소중하니까!
처음에는 안하겠다더니 "한번 더 할까?" 거울을 보다가 말하는 남편. 아이고 그리 좋았을까!
남편에게 가장 최근에 받은 품위유지비
우리는 살면서 돈이 없어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다양한 의식과 의례를 많이 만들었다.
아이들이 태어나서는 가족의 문화를 재미있게 만들어보겠다고 겁도 없이 아예 홈스쿨링을 하기도 했다. 학원도 보내지않고 사교육도 하지 않으니 우리는 그 비용을 절약해서 자주 긴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서로가 서로에게 독립하라'이다.
결혼하면 외로움이 해결될줄 알았다. 하지만 왠걸. 외로움이라는 나의 근원적인 감정은 아주 어릴적에 형성된 초감정으로 누구와 함께 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연애할때는 덜 외롭긴 했다. 누군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느낌 그것때문에 결혼했고 그러면 더이상 외로움이라는 감정에서 헤매지 않아도 될것 같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실은 결혼하고 더 외로웠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 일중독이었던 남편과 살면서 외롭다고 소리쳐보고 보따리도 싸보았으나 친정으로도 어디로도 내가 갈곳은 없었다.
그 시작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는데 대략 30대 중반부터였던것 같다. 나는 나를 만나기 시작했다. 기대를 저버린 남편이나 끝없는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하는 아이들보다는 '나'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바로 지금 현재 내가 나의 중년을 흥미롭게 보낼 수 있는 실질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처음에 그것은 '가만 나는 나를 잘 모르는구나! 어이가 없네!'라는 인정과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라는 진정한 욕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성공한 사람들이 명상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신을 최적화로 만들듯 나는 내가 믿는 신앞에서 날마다 두시간씩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울었다.
점점 나에 대한 객관화가 가능해졌다. 물론 우리는 신이 아니고 나와 나는 밀착력이 참으로 심한 관계이므로 완전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자꾸 연습하다 보니 메타인지 근육의 밀집도도 높아지긴 하더라. 그래서 과거처럼 매건마다 주관적인 감정과 스스로에 대한 비하에 시달리지 않는 내 모습에, '아 이게 객관화가 잘 진행되는 중이라는 증거군'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그 열매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면서 나는 그것을 나의 삶에서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작은것부터 해보자. 결국 강의를 하고 싶었다.다시 방송을 하기에는 늦었지만 무대가 그리웠다. 내 컨텐츠를 들어줄 두 명이상의 청중만 있으면 무대를 아주 불살라버리리라.
열심히 공부했다. 남편과 자녀들외에 지적, 감성적인것들을 나눌수있는 타인들이 슬슬 생기면서 그리고 누군가에게 기여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혼자있게 되는 순간에도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 나를 돌보기, 힐링, 쉼, 안식, 재정비, 다시 꿈꾸기 같은 단어들이 들어서서 나를 그리고 나의 인생을 충만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남편앞에서도 더 당당해지고 더 잘 지낼수있게 되었다.그렇다. 남편아니라 아무리 가까운 사이어도 자기 연민에 빠진사람에게 늘 같은 위로를 해주긴 쉽지 않은법. 그제서야 남편이 원수가 아닌 나의 지지자 격려자 응원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함께 있다고 외롭지 않은것은 아니다.
함께 있어도 각자에게 주어진 오롯한 삶에서 독립적인 사람이 될 수 있어야만 서로에게 더 섹시하고 멋있어진다는것을 잊지말자.
나를 만나고 나를 견고히 세우고 쿨하게 살아갈 나만의 방법을 찾았는가? 그 여정을 시작했는가? 그러면 되었다.
결혼생활도 더 가벼워지고 재밌어질것이다.
뻔하지만 실행력있는 비법으로 쫄깃하고 행복하게 사는 우리 부부의 이혼 안 할 수 있었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