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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혼 안 한 3가지 이유

사랑이 감정인 것 같지?

by 따뜻한 스피커

지난 화 '우리 이혼 안 했어요'라는 글이 17만 뷰가 넘는 조폭(조회수 푹발, 브런치 신종어)이 일어나고 현재 구독자수가 125명이 되었다.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된 지 두 달 차다.

선배 작가들에게는 그게 별거였던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기억해보라. 처음으로 백 명이 넘었던 그 순간의 벅차오름을.

조회수와 라이킷도 감사하지만 구독자가 늘었다는 것은 기대와 기다림이 담겨있기 때문에

더 빡센 감사로 다가온다.


깨닫게 된 것은 사람들은 착한 글도 의외로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착하다고 꼭 지루한 것은 아니야"

영화 어바웃 타임의 여주인공의 대사처럼.


우리의 일상은 극단으로 치닫는 일보다

실은 소소하고 작은 사건들의 반복이다.

그 반복들 속에서 어쩌다 한방보다는

자잔한 즐거움의 빈도를 늘이는 것이

인생을 축제처럼 사는 능력이라는 것을 많은 분들과 나눌 수 있어서 설렜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사망률보다 떨어진 최초의 날'이라는 기사를 보고 영감을 받아 쓴 글이었는데, 오! 미혼들이 찾아와서 결혼의 '브라이트 사이드'를 보게 되었다는 댓글들을 남겼다. 게다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팁을 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했다.

아 그럴 때의 코 끝이 시큰해지는 느낌이란.

글쓰기의 고됨까지 사라졌다고 하면 오버일까?

우리의 평범한 삶이 더 응원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에 함께 연대감을 이룬 것 같아 고맙다.

더 잘 살고 싶다.




가끔 보던 유튜브 채널에 한 이혼 전문 변호사 나와서 끌리듯 보게 되었다.

그는 다양한 현장의 케이스를 이야기하면서 결혼하기 전 연인과 교제를 할 때의 유의점과 이혼할 때 꼭 기억해야 할 것 등 중요한 팁들을 많이 방출해주었다.


"과거에는 결혼한 10쌍 중 한 두 쌍이 이혼했었다면 지금은 두세 쌍이 이혼합니다. 거의 30프로에 육박하는 비율로 이혼하고 있다는 것이죠. 저는 이혼하지 않으려면 다 해보고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많이 자보고, 도박중독이 있는지 카지노도 가보고, 주사가 있는지 술도 같이 많이 마셔보고 말이에요"

유쾌한 이혼이란 없는 법.

이혼 현장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이 직업인

그 변호사의 말은 간접경험이 진하게 묻어나는 매우 현실적인 조언으로 들렸다.

댓글에는 '그러니까 결혼은 아예 안 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미혼들의 수많은 글이 달렸다.

이 변호사의 말이 일리 있음을 나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말하는 방법이 기준이고 다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원해서 경험의 통계치를 열심히 말한 것뿐. 케이스마다 얼마나 다른 변수가 있었겠는가.


'우리 이혼했어요'의 이하늘 커플을 보면 11년 동안 연애와 동거를 하다가 결혼했지만 2년 만에 이혼을 했다.

결혼 전 분명 긴 시간 함께 했건만 결혼 후 왜 그렇게 빨리 헤어졌을까? 상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분명 서로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는데도 헤어졌다고 했다.


이하늘이 전 아내에게 말한다.


"그렇게 네가 원할 때 진작 결혼할걸.

너무 시간을 끌었었다. 너한테 너무 미안한

부분이다"


부부관계 결국 정해진 답이란 없다.


유독 내게만 가혹했던 악 조건 속에서 결혼한 내가 20년 넘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즘 글을 쓰며 의도치 않게 '우리 부부생활 탐구'를 하는 중인데 이상하게 남편이 더 고맙고 예뻐 보인다. 그래서 요즘 부쩍 더 로맨틱한 우리 부부다. 글쓰기가 고마워지는 순간이다.




총 4년 간의 극심한 결혼 반대


그 중 3년 간은 서울 부산 장거리 연애

(내가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했기에 거의 뒤를 댔던 비행기, 기차, 고속버스 등의 교통비와 매달 전화비를 다 모았으면.. 너끈이 집 한 채 사고도 남았을 거라는 지인들의 뼈 있는 농담에 결혼을 처음 결심하게 되었다는 팩트체크를 해본다. 원금 회수는 끝났고 품위유지비는(우리 이혼 안 했어요. 1화) 그러니까 이. 자. 인 것으로. 하하)

그중 1년은 한국 중국 간 국제연애

이때가 가장 위기였다.

안 그래도 외로움이 불치병이었던 나는, 장거리 연애는 열혈 반대론자였다.

장거리 연애하는 친구들 치고 성공하는 케이스를 잘 보지 못했으며(주관적 통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궁색한 상황과 함께 '언제까지 가나 보자'라는 괜한 관중을 만들게 되는, 사람을 참 초라하게 만드는 연애로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나는 사랑의 5가지 언어 중 '함께 있어 주기'가 1위인 사람이었다. (참고: 게리 채프먼의 5가지 사랑의 언어: 인정하는 말/함께 하는 시간/선물/봉사/스킨십)


하지만 내가 바로 그 애매하고 유혹 천만 한 장거리 연애의 덫(?)에 걸려든 장본인이 되어버렸다.


방송국 근무 시절의 나의 주 업무 중 하나는 다양한 분야의 성공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글을 쓰고 생방송을 진행하는 일이었다. 20대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던 그 시절.

가만히 있어도 빛날 그때에(=가만히 있으면 병날 그때에) 왜 일을 하다가 이성적인 호감을 보이던 사람들이 가. 끔. 은.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유혹은 따로 있었다.

매일 발바닥 땀나게 취재, 편집, 방송원고를 쓰는 밤이면 밤마다 피자와 족발 백판 정도를 함께 뜯어먹다 보니 정이 든 동료 PD나 기자들의 사적인 데이트 신청이 그것.

깡그리 거절하기가 솔직히 그리 쉬웠겠는가.(게다가 그들은 돈도 잘 벌었다)

회사의 여자 동료들이 하나 둘 대학 때부터 사귄 옛 남자 친구들과 헤어지더니 선을 보거나 같은 방송국의 동료들과 커플로 맺어져 청첩장을 돌리는 것을 하루에 한 번 씩은 보아야 했다.

가려면 지나 곱게 갈 것이지 항상 내게 잊지 않고 묻는다.

"넌 언제까지 그 남자를 기다릴 거야? 그냥 마 고마해라~" (나의 일터는 부산이었다. 내 고향은 대전이지만 TMI)


하지만 나는 그 어려운 것을 해냈지 말이다. 지지해주는 지인들도 없고 부모들의 환영도 받지 못하는 씁쓸함 속에서,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는 외로움도 이기며 장거리 연애를 해낸 것이다. 물론 딴짓과(내가), 딴생각도(이건 두 사람 다가 아닐까?!)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번번이 나의 바짝 약을 올리는 테스트에도 꿈쩍 않던 당시 나의 남자 친구였던 지금의 남편.

그의 산 같은 사랑은 신뢰로 승화되었고 우리는 결국 사랑과 전우애로 하나가 되었다.


계속 돈을 길에 뿌려가면서 만나던 어느 날

그 날이 왔다.


연애 5년 차 급작스럽게 결혼 허락이 떨어졌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착하기도 하지.

우리는 그동안 애태웠던 시간들에 대해 조금의 원망도 하지 않았고 그저 기뻐서 두 손을 맞잡고 함께 펑펑 울었다.




결혼 허락을 받을 때까지 착하게(또는 집요하게?) 기다리긴 했지만 우리의 자식 된 도리와 양보는

거기까지면 충분했다고 생각했다.

그 후 결혼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과 결혼생활의 모든 구성은 시부모님의 간섭이 일정 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저희가 결정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라는 말이 나오면 부모님은 더 이상 말을 못 하시게 되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남편의 실행과 나의 침묵의 노력)


우리가 이혼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1. 첫 번째가 '부모를 떠나라'였다. (지난 화에서도 말했듯이 오해하면 안 된다.)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결혼 전 시부모님은 우리 부부에게 성당에서 결혼하면 집도 사주고 차도 사준다고 하셨다. 내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밖으로 들릴 정도로 잠깐이었지만

선택은 긴장되었고 쉽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교대로 한 명씩 따로 불러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우리 둘 다 거절했던 것이다.

그냥 주시면 감사히 받겠는데 조건이 붙고 우리를 조종하시려고 하는 돈은 받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일반 예식장에서 결혼했다.

아직도 시아버님의 마지막 멘트가 잊히지 않는다.


너네는 정말 똑같은 애들이구나
마음대로 해라!

그렇다. 우리는 똑같아야 했다. 한 팀이니까.


2. 돈이 없으면 창의적이 돼라! 두 번째는 부모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으니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하게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다. 창의적인 의식과 의례를 자주 만들어 삶을 축제로 만들라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인생의 행복지수는 얼마나 의미부여를 잘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우리 이혼 안 했어요 1화 참고)


3. 세 번째! 여기서부터가 심화 편인데 '서로가 서로에게 독립하라'이다. 지금까지 부부가 한 마음이 되어 똘똘 뭉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온 거 아닌가? 갑자기 서로가 서로에게 독립하라고? 그렇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관계는 불안하다. 불안한 것은 불화의 씨가 된다.

부부적 연대감을 가짐과 동시에 각자 개별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어려운 개념이다. 친밀감과 독립성을 함께 갖는다는 것.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얻기까지 우리 부부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균형을 잡기만 하면 살수록 사는 것이 재미나다.


사랑이 감정인 것 같지? 에헤이
그거 능력이다 너 사랑하는 능력

부부관계도 사랑의 중력과 거리 유지, 둘 다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 개념에 주의해서 사랑의 관계를 함께 구성해 나가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고 능력이다.

뭘 잘하는 재능이나 돈을 버는 능력은 나중 이야기이고 같이 있어도 괜찮고 혼자 있어도 괜찮은 내면의 힘과 자신의 세계를 튼튼히 구축해나가는 능력 바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말이다.


함께 있어주기가 사랑의 언어였던 나는 일중독인 남편의 성향이 힘들어 고꾸라졌었다.

처음에는 분명한 원인을 알지 못해서 싸우기도 했지만 나의 불안정하고 유리 멘털 같은 내면을 치유하기 위해 공부하고 기도하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나를 알기 위해 노력했고 나를 아니 힘이 생겼고 능력이 생겼다. 그다음에야 남편과 협력이 가능했고 아이들도 잘 도울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기다리며 원인제공을 한 자신의 모습을 바꾸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어느 학자의 말처럼 결혼을 하는 이유는 안정적인 소속감을 누리고 싶어서라고 한다. '못난 모습을 보여도 이렇게 사랑받을 수 있구나' 하는 안심이자 도피성 같은 것 말이다. '내가 가식적으로 굴지 않아도, 나의 신분과 위치 명예의 옷을 벗어도 이렇게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당신이 있구나'를 느끼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 충족이 결혼의 이유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쉬운가. 그런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그 학자는 한 마디를 더 덧붙인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라고.

여전히 어른이 되느라고 고생하고 있고 사느라고 다 고단하다. 서로를 가엾게 여기는 것. 기대하고 덕 보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를 애긍히 여기는 마음을 마음속에서 훈련해보자. 물론 결혼하지 않고도 다른 관계를 통해서도 그런 것을 배울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부부를 통해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고 나는 동의하며 확신한다.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확장되어 얻어지는 능력과 사랑 그리고 우정과 최고의 안정감을 선물해주는 솔메이트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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