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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케 Apr 04. 2023

한의사도 전공의 있습니다.

02. 새벽의 좀비들, 그런데 가운을 입은.

06시.

한방병원 인턴의 아침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 화면의 빛이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면 미동도 없던 이불이 꿈틀댄다.

못 들은 척 다시 잠을 청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방금 바로 옆 침대의 상사도 같은 소리에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파티션 없는 사무실, 부장님 앞자리 직원이 이런 기분일까.

아니 거긴 적어도 잠은 따로 자지 않나...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이 길어지기 전에 몸을 일으켜 이층 침대를 내려간다.


처음 당직실에서 잠을 깼을 때를 생각한다. 이층 침대에 익숙하지 않아 한 손으로 플래시를 켜고 조심히 한 발 한 발 옮겼었더랬다. 물론 지금은 앞으로도 뒤로도 사다리를 오르내릴 수 있으며 어느 정도 내려간 뒤 바닥으로 뛰어내리기까지 한다. 나름대로 삶의 노하우를 터득한 스스로의 모습이 대견하다.


방 한편에 걸린 스크럽과 가운을 주섬주섬 껴입고 당직실을 나서면 비슷한 몰골의 다른 인턴들을 마주할 수 있다. 인턴들은 이른 기상시간 탓에 세수도 못하거나, 겨우 세수만 하고 병동을 배회하는 일이 허다했는데, (물론 난 전자였다) 서로의 행색을 모르는 척해주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병동에 들어서면 다 같이 약속이나 한 듯 한 방향으로 이동한다. 소리도, 사인도 없이 꺼추름한 얼굴과 죽어있는 눈빛으로 터벅터벅 무리 지어 걷는 모습이 흡사 '새벽의 저주'에 나오는 좀비들을 생각나게 한다.


이 기묘한 동행이 인턴 일과의 첫 시작, '라운딩'이다.



.

라운딩은 단연 인턴 업무의 꽃이었다.

오죽하면 레지던트가 되고 가장 좋았던 점이 '라운딩 면제인 점'이었을까.

이쯤 되면 라운딩의 고단함이 어느 정도인지 예상할 만하다.

간혹 '라운딩'이라는 단어가 여유롭고 어쩌면 조금은 한가롭게 들리기도 하는 모양인데, 단어가 골프의 그것을 연상시키다 보니 생겨난 오해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의료직군에서의 '라운딩'이란, 담당 입원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순찰로, 그 책임과 의미가 막중하다.


우리 병원에서는 인턴이 새벽과 저녁에 각각 라운딩을 돌았는데, 새벽 라운딩이 특히 고되었다. 내 잠도 제대로 깨지 못한 채 잠들어있는 환자를 깨우는 것도, 잠에 취한 환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도 참 고역이었으니. (실제로 아침에 나와 대화를 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환자를 깨웠다가 불만 섞인 토로를 듣는 일도 많았는데 또 필요한 부분을 꼼꼼하게 체크하지 못하면 레지던트에게 싫은 소리를 듣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팍팍한 아침이었다.

그렇기에, 환자에게도 레지던트에게도 핀잔 없이 라운딩을 끝낸 날은 어쩐지 일이 술술 풀릴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시작을 할 수 있었다.


하루의 첫 일과를 훌륭하게 끝마치기 위해서,

어쩌면 스스로의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를 위해서,

환자와 레지던트 사이의 줄타기를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병원 창문 너머로 해가 뜨는 게 보였다.


이렇게 오늘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새벽이 지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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