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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케 Apr 11. 2023

한의사도 전공의 있습니다.

04. 첫 오프는 엉엉 우는 것이 국룰! (2)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학생인 나에게 방탈출카페는 상당한 거금이었다.

그래도 남자친구의 첫 오프를 특별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투자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고 생각했다. 사실은 나빴다, 엄청 나빴다!)

그런데 우리의 특별한 데이트에 대한 남자친구의 반응이 예상과는 달랐다.

시종일관 소극적인 태도와 느릿한 동작.

평소에도 장르를 막론하고 머리 쓰는 게임이라면 새벽까지 매달리곤 했던 그의 모습은 어디 가고, 의욕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두 번째 방으로 진입했을 때 남은 시간은 10분 남짓, 이번엔 내가 폭발할 차례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

"하고 있잖아..."

"계속 의욕 없이 퍼져있잖아. 같이 온 사람은 생각 안 해?"

"아니 너무 피곤한데 어떡하라고..."


내 날 선 말투에 남자친구가 작게 투덜거렸고 이게 도화선이었다.

그렇게 말다툼이 시작되었고, 남은 10분을 오롯이 싸움에 썼다.



.

기분이 잔뜩 상한 채로 방탈출 카페를 나섰다. 팽팽한 분위기 사이 동행인 듯 아닌 듯, 애매한 간격을 두고 대학로를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데이트 종료를 선언하고 싶었지만, 예약해 둔 초밥집이 마음에 걸렸고 그건 상대도 같은 마음인 듯했다. 우리 사이에는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암묵적 룰이 있었으니까.

초밥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초밥집에서도 말이 오고 가는 일은 없었다. 간혹 욱하는 내가 제 풀에 구시렁거리면 남자친구가 가볍게 노려보는 정도의 눈빛 교환이 전부였다.


평소와 같았다면 내 복화술 같은 구시렁거림에 하릴없이 웃었겠지,

이 사람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그 때 느꼈다



그렇게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밖으로 나와 천변을 따라 걸었다.

우리는 꽤 오래 만났고, 또 제법 잘 맞았기에 싸우는 일이 잘 없었다. 싸우더라도 얼굴을 마주하면 터져 나오는 웃음에 진지한 분위기를 잡기 어렵기도 했고.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남자친구의 굳은 입가는 풀릴 줄을 몰랐다.

나는 본 적 없는 반응에 눈치보기 바쁜 동시에, 괜한 자존심으로 더욱 부루퉁해졌다.

입이 댓 발 나오기 몇 초 전, 남자친구가 걸음을 멈췄다.


.

"뭐가 문젠데."


뭐가 문젠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뭐가."


"방탈출하고 싶대서 했잖아. 초밥 먹고 싶대서 초밥도 먹었고."


문제의 갈피도 못 잡는 이 남자를 어째야 하나.


"그게 문제야? 하기 싫었으면 처음부터 하기 싫다고 하든지. 오빠가 괜찮다고 해서 방탈출 하러 간 거잖아. 그럼 이왕 간 거 좀 즐겨주면 안 돼? 그게 안될 것 같으면 오늘 피곤해서 못하겠다고 하든가!"


한번 발동걸린 설움이 가슴께에서 밀어올라오듯 터져나왔다.


"아니, 왜 내가 계속 눈치 봐야 돼? 이거 내가 잘못한 거야? 왜 자꾸 분위기 안 좋게 만들고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데, 왜!"


그도 지지 않았다.

"네가 하고 싶다며! 네가 하고 싶대서 피곤한 몸 이끌고 같이 했잖아. 내가 박차고 나가길 했냐, 뭘 했냐. 잠을 제대로 못 잤어. 그래서 집중 안되더라. 근데, 집중 안 되는 거 그거 내 탓이냐? 나는 나름대로 너한테 맞추려고 했는데 왜 너는 화부터 내는데?”


슬슬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캠퍼스 커플인지라 연애를 시작하고 긴 시간 떨어져 지낼 일이 잘 없었다. 그래서 '한 달만의 데이트'에 힘 좀 줬다. 그게 그렇게 잘못일까.

데이트 코스의 선정에 실수가 있었던 거?

인정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을 이렇게까지 모를 일인가.


6년.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연애를 했지만 처음으로 서로의 언어가 너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어코 울음이 터졌다. 화가 났다기보다, 서러워서.

내 의도와 전혀 다르게 진행된 오늘 하루가 너무 서럽고 아까워서.


터져 나온 내 울음에 남자친구는 조금 당황하는 듯했고, 곧이어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내가 미안' '그만 울어'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고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려지던 차였다.

.

.

.

훌쩍.


머리맡에서 불길한 효과음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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