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첫 오프는 엉엉 우는 것이 국룰! (3)
그는 둥글둥글한 성격 속, 이상하게 칼 같은 구석이 있었다. 다정했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그래, 남자친구는 눈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남자친구의 훌쩍임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정확히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빨갛게 달아오른 T존, 불안한 시선처리. 분명히 눈물을 흘리기 직전의 그것이 분명했다.
그 전조를 느끼자 눈물이 멈추고 몸이 절로 그쪽으로 내달았다.
이렇게까지 힘든가?' 하는 생각 반, '내 잘못인가?' 하는 생각 반. 꼬리를 물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외면하고 모른 척 작아진 그를 껴안았다.
방금 전까지 울던 놈이 달래던 놈을 위로하는, 참으로 기이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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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의 울음, 아니 (본인 주장에 따르면) 울컥함은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에 기인한 것이라고 했다. 킵 교육기간 동안 이리저리 혼나기만 한 탓에 의심과 회의감이 조금씩 쌓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단다. 그런 와중에, 오랜만에 만난 여자친구에게 대인배처럼 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났던 거라고.
그는 어른스럽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사과하며 조용히, 하지만 강하게 자신이 보낸 1개월이 얼마나 혹독 했는지에 대해 얘기를 늘어놨다
어쩌면 조금은 지루한 고해성사가 길어지는 걸 느끼며, 나는 까맣게 흐르는 천변을 넋 놓고 바라봤고 그는 내 태도가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작은 한숨을 뱉었다.
"너도 해봐, 그럼 알게 될 거야."
예언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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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뒤, 공교롭게도 남자친구의 말은 씨가 되어 열매를 맺었다.
나 또한 전공의의 길을 선택했고, 인고의 킵 기간을 거쳐 '예민 보스'로 거듭나버린 거다.
한 술 더 떠서 나의 첫 오프날은 호르몬의 장난과 제대로 겹쳐버렸다.
그것뿐인가,
예약해서 방문한 음식점에서, 종업원이 30분이 넘게 주문을 받아주지 않았고,
지하철 환승을 눈앞에서 놓쳤으며,
가려고 했던 브런치 집은 1시간 넘게 웨이팅을 했다.
나는 스치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만큼 분노로 들끓었지만, 이미 유경험자였던 나의 남자친구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 호화 호캉스'로 이에 맞섰다.
덕분에 나의 첫 오프는 맥주 한잔하고 찔끔 울고, 소주 한 병하고 엉엉 우는 것 정도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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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첫 오프날의 추억을 병원 동료들과 공유할 때면 다양한 얘기들이 쏟아진다.
식당의 종업원이 자기한테 너무 친절해서 울어버렸다는 사람, 와인 코르크가 와인 병 속으로 빠져버려서 밥 안 먹고 집으로 와버렸다는 사람, 그냥 병원으로 돌아오지 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사람...
그 이야기를 다 옮길 수 없음에 아쉽지만, 모든 얘기에 공통점이 있다면, 떨어진 자존감과 습관적 위축이 깔려있다는 것.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진 건, '아 전부 처음을 힘들어하고 있었구나' 하는 공감과 위로를 얻었기 때문이려나.
혹시 지금 비슷한 상황을 겪는 사회초년생이 있다면 꼭 명심하시라,
누구에게나 처음은 어렵고, 또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그러니 긴 고생 끝에 찾아온 혼자만의 시간이 있다면 주저 말고 펑펑 우시길.
첫 오프 때 우는 건 '국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