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개미의 세상살이
만년필의 이미지는 고급지다.
몽블랑이나 그라폰 파버카스텔 같은 - 척 보기에도 뭔가 있을 것 같은 - 그런 만년필이 아니더라도,
만년필을 쓰는 사람의 이미지는 평범함과 조금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호화로운 사무실에 혼자,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다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는 사람이 내미는 종이에 뭔가를 휘갈기거나,
뭔가 있어 보이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이름만 쓰고는 활짝 웃으면서 일어서서 악수하는 그런 장면에서 만년필이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만년필은 뭔가 있어 보이는, 평범한데 쓰면 안 되는 그런 필기구가 되어버렸다.
내 주력 만년필은 몽블랑 146이다.
얼마 전까지는 몽블랑 미드나잇 블루와 발자크 잉크를 번갈아 쓰다가 최근에 파카 큉크 블루라는 잉크를 사용한다.
(모두 푸른색 계열인데 미드나잇 블루는 검+파, 발자크는 환한 파랑, 큉크 블루는 진짜 파랑, 요렇게 이해하시면 된다.)
주로 146을 쓰다가 책에 줄을 긋거나 뭔가 중요한 부분을 표시하며 읽어야 할 때는 파일로트 헤리티지 92를 사용한다.
여기에는 이로시주쿠 유야케라는 잉크 혹은 에델스타인 가넷이라는 잉크를 사용한다.
(모두 붉은색 계열이고 유야케는 주황, 가넷은 검+빨, 요렇게 이해하시면 된다.)
오랜 방황을 거친 후 정착한 나름의 조합이다.
만년필과 관련된 질문 중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단연 가격이다.
다이소에서 파는 2000원짜리부터 한정판으로 나오는 수백만 원짜리 만년필까지 다양하게 있다.
우리 주변의 모든 물건이 그렇듯이 아주 싼 것부터 아주 비싼 것까지 있다.
괜찮다고 할 만한 만년필은 10만 원 언저리, 좋다라고 할 만한 만년필은 30만 원 언저리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두 번째로 많은 질문은 무슨 만년필이 제일 좋은가이다.
뻔히 맛을 아는 짜장과 짬뽕도 고민하는데 제일 좋은 만년필을 어찌 고르겠는가?
나름 이름이 있는 만년필이라면 사용에 전혀 지장이 없고, 만듦새도 충분히 좋다.
어느 수준 이상의 만년필이라면 좋다 나쁘다 구분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좋다.
선택은 취향을 따를 뿐이다.
보통 만년필을 좋아하는 이들은 몽. 펠. 파 (몽블랑, 펠리컨, 파커의 줄임말)를 선호한다.
이외에도 만듦새에서 가히 최고라 할 수 있는 그라폰 파버카스텔,
참 예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는 오로라와 같은 브랜드들도 매우 매우 좋은 브랜드들이다.
마지막으로 불편하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
사실 전혀 불편할 게 없다.
커피를 드립 하여 마시는 사람에겐 드립 하는 과정이 즐거움이듯,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세척하고 새로운 잉크를 채우는 일이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세척하고 잉크를 채우는 일이 불편한 이들에겐 만년필이 불편한 필기구일 테고,
이를 즐기는 이들은 만년필이 재미있는 필기구가 될 것이다.
처음 시작하고픈 사람이라면 그냥 아무 만년필이나 먼저 손에 잡고 써보는 걸 추천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그냥 쓰면 된다.
선택은 익숙해진 다음 고민해야 할 일이다.
무려 일곱 자루의 만년필을 가지고 다니는 선배가 있다.
얼마 전에 산 잉크를 쓰기 위해 밤마다 열심히 필사를 한다고 했다.
필사가 목적이 아니라, 잉크를 쓰는 것이 목적이다.
만년필에 진심인 이 선배가 3여 년 전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네가 사장이냐? 만년필 쓰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