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을 완벽히 끝내놓지 않으면 온전히 휴식이 어려운 성격.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뒤섞인 부지런함. 무엇인가 하고자 마음을 먹으면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추진력. 이런 불같은 것들이 합쳐진 나의 성격에 딱 한 군데 게으른 구멍이 존재한다. 열심히 만들어 낸 작업물을 기록하는 부분이다.
한 달에 수십 개의 원고를 집필하고, 레시피를 개발하고, 사진촬영을 하여 다양한 매체에 송출한다. 그런 것들을 잘 기록하고 모아 두어야 하는데, 늘상 그 부분에서는 야무진 구석이 떨어진다. 그래도 이 게으름을 평생 방치하지는 않고...다만 1년이 지난 후에라도 만회하고자!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 작년에 참석했던 요리 대회 후기를 남겨본다.
"너에게 딱 맞는 요리 대회가 있어! 보자마자 너 생각이 나더라고. 꼭 한 번 참석해 봐!"
오랜만에 카톡이 온 친구는 안부인사도 없이 대뜸 본론부터 꺼냈다. 그리고는 곧바로 링크를 하나 보냈다. 링크를 열어보니,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에서 주관하는 온라인 요리대회였다. 작년에는 처음 겪는 코로나 사태로 대부분의 오프라인 행사는 취소되는 흐름이었다. 그래서 손으로 재료를 만지고 볶고, 입으로 먹는 요리 대회조차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는 내가 기획팀에서 근무했던 이력도 있고, 이래저래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아 나도 참가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두 가지 맹점이 있었다. 하나는 온라인 요리대회인 만큼, 레시피를 영상으로 촬영하고 편집하여야 한다는 것. 그때까지 나는 영상 편집은 전혀 손대본 적이 없었다. 거의 매일 사용하는 카메라에서조차 동영상 기능은 단 한 번도 사용한적 없는, 그런 백지와도 같은 상태였다. 레시피를 개발하는 것보다 영상 편집이 더 큰 문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두 번째 문제점은 대회의 참석 기간이 고작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언제 레시피를 개발하고, 요리 과정을 촬영하며, 편집을 다 마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왕 알려줄 거 일주일만 더 일찍 알려주지...친구에게 살짝 원망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사람이 의지만 있다면 어떻게든 길은 만들 수 있는 법이다. 약 4년간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 온 나는 은연중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작년에는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코로나 사태로 기다림의 연속인 지루한 날들이었다. 강의도 취소하고, 다른 일도 쉽게 손 벌릴 수 없는...그런 상태에서 새롭게 도전하는 자극이 필요했다. 여기에 약간의 난관은 승리할 때의 짜릿함을 더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농산물 구매&활용 레시피
UCC 공모전
대회의 형식은 이러했다. 국내산 농산물을 사랑하는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고, 나만의 참신한 우리 농산물 레시피를 제출하면 되는 거였다. 친구한테 이 요리 대회가 있다고 연락을 받은게 월요일이었고, 대회 마감일은 일요일이었다. 월요일동안 레시피를 개발하고, 화요일에 레시피에 들어가는 농산물을 구매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수요일에 요리 과정을 본격적으로 촬영하고, 목,금,토,일요일 4일 동안 영상 편집을 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나름 합리적인 계획을 짰다.
https://blog.naver.com/gr22nade/221956542953
여러 농산물 중에서도 나의 선택을 받은 것은 '단호박'이었다. 그 당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면역력 강화가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 흐름을 타고 면역력 증강 식품이 인기를 얻고 있었다. 샛노란 속살의 단호박 역시 면역력 증진 효능을 가진 식품 중 하나였다.
'그래, 메인 재료는 단호박으로 하고...어떤 요리를 하지?'
평소에 요리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포인트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낮은 문턱'과 또 다른 하나는 '가성비'다. ‘낮은 문턱’이라 함은 초보자도 실패 없이 완성할 수 있는 쉬운 난이도를 뜻한다. 또한 고급 조리도구와 진귀한 식재료가 당연하게 있는 요리 연구가의 부엌과 달리, 단촐한 살림살이만 구비하고 있는 자취남녀 역시 쉽게 따라 만들 수 있는 레시피를 말한다. 두 번째 포인트인 '가성비'는 기왕 요리하는 거 쉽게 만들고, 실패율도 낮고, 한 번에 두 가지 요리가 나오는 경제적인 특성을 뜻한다. 이는 내가 수많은 쿠킹클래스를 기획할 때도 똑같이 적용했던 사항이었다.
< 단호박 샌드위치 & 단호박 그라탕 >
달콤하고 든든한 단호박 속을 만들어 샌드위치로도 즐기고 그라탕으로도 먹을 수 있는 1석 2조 레시피를 고안했다. 아, 지금 영상을 다시 보니 무려 '1석 3조'라는 거창한 말을 써놨다. 맛, 영양, 비주얼까지 다 잡았기 때문이란다. (...) 다소 호기로웠던 1년 전의 스스로가 살짝 부끄러웠는데, 영상을 다 보고 나니 맞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그라탕의 경우는 정말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리고 싶은 욕구가 들 정도로 비주얼이 화려하기 때문이다.
RECIPE
단호박은 삶아서 으깬 뒤에 크림치즈를 섞는다. 이 때, 전자레인지를 사용하여 단호박을 쉽게 찌는 팁도 깨알같이 추가했다. 여기에 볶은 마늘, 양파, 베이컨을 넣고 섞어서 든든한 단호박 속을 완성했다. 이 만능 단호박 속을 식빵 사이에 넣으면 첫 번 째 메뉴인 부드러운 단호박 샌드위치가 완성된다. 그라탕 용기에 단호박 속을 넣고 모짜렐라 치즈를 듬뿍 얹어 구워내면 두 번째 메뉴인 단호박 그라탕이 탄생한다. 그냥 구워내면 재미가 없으니 샌드위치를 만들고 남은 식빵으로 크루통을 만들어 그라탕 위에 얹어준다. 짭쪼름한 치즈와 아주 잘 어울린다.
이렇게 쓰고 나니 하루 만에 고안한 레시피치고는 맛, 영양, 가성비, 비주얼까지 어느 정도 다 만족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방심하기는 일렀다. 아직 큰 산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영상 편집의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시간도 촉박한데 괜히 고퀄리티에 욕심을 내다간 이도저도 다 놓칠 것 같았다. 지금은 기본 편집 방법만 익혀서, 정확하게만 보여주자! 네이버에 '무료 편집 프로그램'을 검색하니 다양한 프로그램이 주르륵 나왔다. 그 중에서 아는 이름이라는 이유로 '곰믹스'를 선택했다. 나중에 영상 편집을 좀 해 보니, 많은 사람들이 첫 편집 프로그램으로 곰믹스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자르고 붙이고의 기능과 자막, 사운드를 입히는 최소한의 기능만을 사용하여 편집을 시작했다.
일단 편집하기 전에 촬영을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생활감 가득한 부엌에서 영상을 찍기는 싫었다. 그래서 내 방의 하얀 책상 위에 휴대용 전기 가스레인지와 그릇을 전부 갖고 왔다. 부엌에서 내방까지 거의 피난민 보따리 수준으로 이고 지고 왔다. 다이소에서 산 삼각대만 믿고 있었는데, 한 없이 가녀린 삼각대 다리가 무거운 카메라를 받쳐주지 못했다. 도마에서 칼로 재료를 썰 때마다 삼각대가 후들거리면서 카메라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죄 없는 카메라만 잡겠다 싶어서 그냥 갤럭시 핸드폰으로 촬영하기로 했다. 나중에 팬에서 재료를 볶을 때는 각도가 안나와 한 손으로 주걱을 잡고 볶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찍었다. 그랬더니 그 부분은 아주 멀미가 나듯이 흔들렸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일단은 이렇게 요리 과정만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편집 시간을 맞추는 것도 참으로 어려웠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분량을 길게 하는 것보다 짧게 줄이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다. 대회 규정은 '3분 내외'의 분량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가까스로 3분 36초까지 줄였다. 아무리 냉정한 마음으로 자르고 또 잘라도, 더 이상은 줄일 수가 없는 마지막 타협점이 3분 36초였다.
온라인 요리 대회 답게, 1차 평가를 거친 출품작들만 주최기관의 유튜브에 올라왔다. 여기서의 조회수가 평가에 30%나 반영이 됐다. 그 당시 친구, 가족, 친척들의 카톡방에 링크를 뿌려 대며 인맥을 총동원했다. 그 동안 잘못 산 건 아닌지, 덕분에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서 높은 조회수가 확보 되었다. 아래 링크를 통해 나의 출품작을 확인할 수 있다.
2주간의 피 말리는 조회수 경쟁이 끝나고 드디어 최종 발표가 나왔다. 결과는... 최우수상, 1등이었다! 대학생 때도 참가 안 해본 공모전 대회에서 무려 1등을 하다니!! 약간 주책스러운 기분도 들고, 어쨌든 기분이 너무너무 좋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오히려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 길었더라면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을 것 같다. 카메라 삼각대도 튼튼하고 비싼 걸로 구매해야 할 것 같고, 영상 편집도 완벽하게 해내야 하고...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아져 결국에는 '에이, 내 주제에 대회 참가는 무슨...' 이렇게 되었을 것 같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다시 한 번 벼락치기 기질이 충만하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사람이란 존재는 급하면 다 하게 되어 있고, 가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길은 어떻게든 만들 수 있다는 나의 지론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영상을 편집하는 내내 단호박만 바라봤던지라 한동안은 단호박이라면 치를 떨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