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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키비스트J Oct 24. 2024

제4편. 외상 후 성장의 저변에 아카이브가 있다.

[재난 아카이브 시리즈] 재건의 아카이브, 외상 후 성장을 위하여

우리는 모두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합니다.



 참사가 일어나고, 구조와 대피가 일어나고, 피해를 수습하고, 일상이 회복되고, 그들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활동하고, 기억하는 공간이 생기고, 교육하고 전승하는 과정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9/11은 현장의 참혹함과 무참함, 인간성의 종말과 테러리즘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넘어서, 평화와 안전, 예방, 그리고 참사의 암담함 속에서 꽃피웠던 이타주의와 공동체 의식을 가르칩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다시 문제를 제기하고 상기하고 재해석하며 기억을 재생산합니다. 재생산된 기억은 시간과 장소에 다시 기록됩니다. 이렇게 소중하게 모인 기록은 반드시 재앙을 반복하지 않는 데에 쓰이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아직 우리 사회가 풀지 못한 또 하나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2022년 촬영된 추모식 사진. 지역 커뮤니티의 추모는 현재진행형입니다. ⓒ Nevada Appear

 아카이브는 과거에 발생한 문제적 상황을 잔인하리만치 직면하게 합니다. 증거와 맥락을 통한 재현이 본질적 역할 중 하나인 만큼, 트라우마를 낱낱이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가 취해 온 행동이 무엇이었는지도 여과없이 드러냅니다. 사건이 전개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심가치가 되어 저변에 자리잡힌 것이 무엇인지를 아카이브에서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외상 후 성장은 외상 후 스트레스(PTSD)와는 반대되는 말입니다. 트라우마 사건을 겪은 이후, 전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재건하는 변화를 뜻합니다. 아카이브는 재건 과정에서 사회와 개인이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창구가 됩니다. 아카이브를 읽어주고, 드러나지 않던 이야기를 이해하도록 돕는 조력자가 있다면 더욱 좋습니다. 아카이브는 폐허 속에서 전보다 나은 삶을 재건할 수 있다는 희망과 성장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를 온라인뿐 아니라 도시 한 가운데에서 전한다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 급박하고 혼란스러운 재난 와중에 전개되었던 연대와 추모, 이타주의, 상호 존중, 평화의 메시지를 여러분의 눈 앞에 전달하는 것 말입니다. 이는 한적한 곳에 누구도 찾지 않는 거대한 추모시설을 만드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날을 기억하게 만들고, 재난을 번복하지 않는 방법을 일상 속에서 계속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지 시티에서 바라본 맨해튼의 Tribute in Light. 9/11 메모리얼에서 쏘아올린 빛입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도 없으면서 위기가 닥치면 떨쳐 일어나는 독특한 유전자를 가진 민중들.” 박시백 작가의 <조선왕조실록> 임진왜란 편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자조적 밈으로 종종 보이는 이 구절이 인기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권이나 책임기관으로부터 무책임함, 무능함, 가해자성에 분노를 느낀 것도 한 몫 하겠습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삼성 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일명 태안 기름 유출 사고), 세월호 참사, 2019년 강원도 산불, 코로나-19 팬데믹 등 우리 사회에서 숱하게 발생했던 재난 가운데 발견된 시민의 ‘집결현상*’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위기는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일상을 제쳐두고 나를 내던질 수 있는 각오, 이런 중요한 결정을 그 누구도 아닌 시민 스스로가 내릴 수 있다는 용기는 사실 자연스러운 인간으로서의 본능임에 틀림 없습니다. 


 기억이 기록으로 남게 된 과정도 중요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던 모든 사람이 기억을 기록화하는 과정에 참여했다는 점, 되돌릴 수 없는 위기상황에 봉착했을 때 비로소 꽃피었던 가치를 영구히 남겨둘 수 있다는 점, 그로 인해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재건하려는 힘이 생긴다는 점은 오히려 폐허 속에 피어난 역설적인 축복일는지 모릅니다. 



*집결현상: 찰스 E. 프리츠, 해리 B. 윌리엄스, <인류와 재난: 연구적 관점에서>, 1957. 그들은 “재난 지역을 향한 움직임은 파괴 현장으로부터의 도피나 대피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 의미심장하다. 대개의 경우, 국내에서 재난이 발생하면 몇 분 안에 수천 명이 재난 지역과 응급처치소, 병원, 구호센터와 교류센터에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이어 부탁하지도 않은 장비와 의류, 식품, 침구 같은 물품들이 재난 지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고 썼습니다. 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재인용(296~297쪽).



※ 이 글은 필자가 2024년 9월 11일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기록과 사회>에 게재한 글을 일부 편집,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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