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이라 하기엔 너무 늦었고, 노망이라 하기엔 너무 이르다.'
나 좋으면 그만 일 것인데, 나만 좋다고 될 일도 아니다.
나는 내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걸 그렇게나 마음속 깊이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이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분간은 가지 않는다. 나 좋으면 그만 일 것인데, 나만 좋다고 될 일도 아니다. 그 나이에 맞는 뭔가는 있을 것이니 그걸 맞추어 가야 하는 것도 삶의 지혜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긴 든다. 아직도 철이 안 든 건지...
요지는 나는 50대 극 후반의 나이에 위치해 있다. 그 말인즉 이제 조금 더 있으면 60대의 선에 들어선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랫동안의 주재기간을 마치고 한국으로 복귀해서 한 3년 정도 있었다. 결론적으로는 다시 나왔다. 당시엔 만 11년을 있었으니 참 오래 있었다. 다시 나와서 있는 기간까지 합치면 13년이 된다. 앞으로 이 기간은 더 늘어날 것이다. 돌아갈 생각이 없으니..
나이 이야기 하다가 뜬금없이 주재기간을 이야기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멕시코에 사는 오랜 기간의 삶에서 나는 소위 Amigo (친구)들 - 한 번 만나고 마는 그런 사이는 아니고, 최소한 한 달에 한번 이상은 만나서 밥 먹는 친구들, 서로가 집안 사정 다 아는 친구들. - 의 연령대가 30대 초반에서 80대 초반이 된다. 그러다 보니 멕시코에서 있을 때 나는 나의 나이가 그렇게나 많은 줄 몰랐었다. 많이 먹긴 했구나..
이렇게 나는 나의 나이를 잊고 있었다.
한국으로 복귀해서 제일 놀랐던 건 세대구분이었다. 정말이지 칼같이 세대구분을 해놓았고, 세대를 나이별로 칼같이 구분을 하고는 그 세대를 살아보지도 않은 작가분이나 기자분들이 그 세대별의 특징들을 아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서술해 놓고 있었다. 소위 나는 70도 되기 전에 70대의 특징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나이가 상당히 들어 있다는 느낌을, 살아오면서 그때 처음 받았다. 2019년 초였다. 나의 나이가 이렇게나 많이 들어 있었던가? 내 친구는 75세의 나이에 왕성하게 자신의 경력을 쌓아가고 있고, 다른 친구는 35세의 나이에 부모 잘 만나서 - 본인이 그렇게 이야기한다. - 거의 놀고먹고 있고, 또 다른 부모 잘 만난(?) 40대의 어떤 친구는 아버지와 본인은 경제적으로는 전혀 상관없다고 하면서 일에 치여서 살고 있고, 어떤 30대의 친구는 회사 만들 구상으로 바쁘게 살아간다. 어떤 친구는 사장과 맞질 않아서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런 친구들에게 비치는 나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자그마하고 깡마르긴 했지만 만나서 식사하면 말이 통하는(?) 그런 친구로 비치지 않을까 싶다. 만나서 밥 먹자 하면 거절하지는 않으니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지금은 친구가 되었지만, 처음엔 경쟁사의 비즈니스 파트너로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협상가였다고 한 친구는 나를 평가하기도 했다. 어느 대화에서도 나이가 끼어들지도 않았고, 나의 나이를 물어보는 친구도 거의 없었다. 가끔 처음 만나는 사람이 나의 나이를 물어보곤 했는데, 그건 아이들 이야기 때문이다. 내가 애가 넷이고 다들 회사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다고 하면 도대체 나의 나이가 얼마나 되냐고 묻는다. 이유는? 서양사람들은 아시아 사람들이 상당히 젊어 보인다 한다. 우리 큰애가 조금 있으면 30이 된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나 좋으라고 하는 소리 인지도 모르겠으나, 서양에 사는 아시아 인들이라면 다들 한번쯤은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이렇게 나는 나의 나이를 잊고 있었다. 그러다 2019년 초에 나는 아주 충격적(?)으로 나의 세대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나의 세대의 특징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그렇게나 중요했다. 사회복지나 시장분석을 위해서 세대별 소비 형태 등의 필요에 의해 세대구분이 필요할 수 있고, 나이대별로 지원이나 복지혜택을 실현하기 위해 이런 구분은 필요하다.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그 구별의 정도가 좀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해서 2019년 즈음에 나는 나의 세대의 특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내가 베이비 부머 세대에 아슬아슬하게도 속해 있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항상 나를 베이비 부머세대라 생각하게 되었다. 앞으로 베이비 부머 세대의 사람들이 조직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인데, 역시나 사회 이슈가 되지 싶다. 이미 사회 이슈가 되어 있을 것이다.
마음이 그렇게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건 정부에 맡겨두고,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나는 소위 '이제 [늙었으니(?) 그럴 나이야.]'에 속하고 싶지 않다는 거다. 언젠가 우리 아버지께서 60줄이셨을 때, 아버지께서는 마음은 20-30대에 못지않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이제 내가 좀 있으면 60줄에 서게 되는데 마음은 20-30대 못지않다고 강변한다. 이거 참...
그런데 실은 지금의 내 마음이 싫지 않다. 20-30대에 가졌던 불안과 혼돈의 마음이 정리되고, 불혹의 나이를 거쳐서 지천명에 다다랐으니 지금의 내 마음이 싫지 않다. 20-30대로 돌아가고 싶냐고 하면 나의 생각은 '굳이..'라는 생각이 들 것 같다. 10대라면 혹시 모르겠다. 10대라면 죽어라 공부를 해서 서울대도 가고 했을지 모르겠지만, 20-30대로 가서 그런 마음을 다시 가지기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불가능한 생각을 하는 것은 나의 취향에 맞지 않으니 접어둔다.
엊그제는 75세의 나이에 아직도 왕성하게 현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친구- 위에 언급했던 -와 식사를 같이 하였다.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 본인 스스로가 고민이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이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느끼기도 하고 인정도 했지만, 최근엔 마음이 그렇게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 보기에 몸은 비만이었고, 걸음도 불편한 친구에다가, 통상 멕시코에서 할아버지가 되는 연령이 50대 중반 정도 되는데, 이를 넘어도 한참 넘었으니,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약간 걱정이 앞선다. 몸이 비교적 불편함에도 밥 먹자 하면 한 번도 'No.' 한 적도 없고, 늘 철강 시장에 대한 이야길 해주고, 열정적으로 장사를 이야기하는 친구인데, 이 친구가 그런 마음을 가질 친구도 아니고, 그런 이야길 할 친구도 아닌데 다소 의아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마음을 잃지 말라고 했다. 그 친구도 웃으면서 그러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이제 그럴 나이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잃지 말라는 나의 위로는 나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럴 나이이니 괜찮다.'
우리 아이들이 가끔 고민을 이야기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대부분의 나의 대답은 '그럴 나이이니 괜찮다.'였다. 실제로 그렇다. 그 나이에 그런 고민을 하는 건 당연해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고민도 하고 부딪혀서 극복도 해가는 그런 자체가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겠는가? 나는 우리 아이들이 내가 젊은 날에 했던 고민들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치열하게 고민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그러면서 커갔으면 한다. 아니 나이가 들어갔으면 한다. 아프지 않으면 그걸로 된다. 고민이 있으면 같이 이야기할 수 있으면 된다. 고민 자체를 밀어낼 필요는 없다는 거다.
'열정이라 하기엔 너무 늦었고, 노망이라 하기엔 너무 빠르다.'
나 역시도 이제 '그럴 나이'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의 마음을 정리하면 '열정이라 하기엔 너무 늦었고, 노망이라 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뭐냐 하면 아직도 '무모함'을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분명 망상인데,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실은 큰일이다. 이 이야기는 좀 더 나중에 하려 한다. 지금 하기엔 다소 이르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