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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Aug 06. 2019

응급실 일기

가시 대공의 해결책


 1.
 '빡빡이'라 부르는 짧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완전히 민머리인 사내는 두꺼운 파자마바지에 패딩 점퍼를 입었다. 패딩 점퍼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고 신체의 다른 부분에 비해 지나치게 볼록 나온 배, 핏발 선 눈, 탄력 없고 거무튀튀한 피부로 미루어 간경화 환자라 짐작할 수 있었다. 알콜 의존증 환자일 가능성이 높았으나 중독자 특유의 공허한 눈빛이 아니라 '희번뜩대다'란 단어가 어울리는 눈빛, 자신이 불안과 불만을 쏟아낼 대상을 찾는 섬뜩한 눈빛이었다. 119 구급대를 통해 내원했으나 이동식 침대에 타지 않고 성큼성큼 공격적인 걸음을 내디딘 그는 응급실 침대가 흔들릴 만큼 세게 앉았다. 체온 측정을 위해 간호사가 귀에 체온계를 꽂자 얼굴을 찌푸렸고 혈압 측정을 위해 팔에 혈압계를 감자 당장 주먹이라도 휘두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혈압을 측정하는 간호사는 180cm 넘는 건장한 남자여서 사내는 힘껏 주먹을 쥐는 것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어디가 불편하시죠?"

 나는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나 차가운 표정, 턱을 약간 들고 가슴을 쭉 편 자세, 강하게 내딧는 걸음걸이로 사내에게 '무언의 경고'를 전했다. 물론 단순히 과시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아니라 나는 실질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대비했다. 사내의 패딩 점퍼 주머니에는 드라이버나 작은 칼이 있을 수도 있고 염산이나 황산 같은 물질이 든 병을 숨겼을 수도 있다. 나는 사내가 갑자기 흉기를 휘두르거나 부식성 액체를 뿌려도 치명상을 피할 준비를 했다. 아울러 일단 피한 다음에는 사내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무력화시킬 행동을 떠올려 보았다. 사내도 키가 작지 않았고 복수로 배가 볼록 나오긴 했으나 알콜 의존증 있는 간경화 환자치고는 팔과 다리가 튼실해서 흉기를 소지하고 있다면 가볍게 볼 상대는 아니었다. 

 "한 달 전부터 뇌가 아파."

 사내 가까이 다가서자 예상대로 술냄새가 풍겼다. 다만 한창 술취한 상태에서 풍기는 냄새는 아니었다. 진탕 마신 후 점차 술이 깨기 시작해서 보통 사람에게는 숙취, 중독자에게는 금단 증상이 밀려오기 시작할 무렵 풍기는 냄새였다. 

 "뇌 자체는 감각이 없으니 뇌가 아니라 머리가 아프겠죠. 최근에 머리를 부딧히거나 특별한 이유없이 의식을 잃은 적이 있습니까?"

 와파린(warfarin) 같은 항혈전제를 복용하거나 간질환이 있는 사람은 사소한 충격에도 뇌출혈의 일종인 외상성 경막하 출혈(traumatic subdural hemorrhage)이 생길 수 있다. 특히 알콜의존증이 있는 간경화 환자는 술취한 상태에서 다친 것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아 특별한 이유없이 2-3주 간 지속되는 두통을 호소해서 Brain CT를 시행하면 경막하 출혈이 발견될 때가 종종 있다. 

 "몰라. 내가 뇌가 아프다면 뇌가 아픈거지, 어디 의사 새끼가 가르치려고 들어!"

 공격적인 태도, 위협적인 몸짓 그리고 과거에도 응급실에서 난동부린 의무기록을 감안하면 만성 경막하 출혈 가능성은 낮았고 사내는 이번에도 술이 깨기 시작할 때의 금단 증상, 중독자 특유의 좌절감, 역시 그런 부류가 갖기 마련인 분노를 가장 손쉽게 해결하기 위해 응급실을 찾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울러 택시가 아니라 119 구급대를 사용해서 비용을 최소화하는 주도면밀함(?)까지 보였다. 다만 사내는 응급실에 180cm 넘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 간호사와 더 건장한 체격의 남자 의사가 있을 가능성을 계산하지 않은 듯 했다.

 "혹시 술 드셨습니까?"

 사내는 핏발 선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 역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사내를 쳐다봤다. 

 "몰라. 왼쪽 뇌가 아프다니까."

 나는 오른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진료하려면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해야 합니다. 문진은 진료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 가운데 하나입니다. 덧붙여 반말하지 마세요. 사회에서 만난 사람끼리 서로 존중해야지 함부로 반말하고 욕지꺼리를 내뱉으면 되겠습니까? 제가 환자에게 반말하지 않고 욕설을 내뱉지 않는 이유는 당신이 무섭거나 대단해서가 아니라 서로 존중하는 것이 사회의 기본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사내는 당장 욕설을 퍼붓고 병원 기물을 내던지며 난동부리고 싶었을 테지만 자신의 뜻대로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으리란 느낌을 받아 무턱대고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꼬리 내리고 순순히 의료진의 지시에 따르는 것은 상상조차 싫을 테니 사내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런데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돌파구가 열렸다. 응급실에 있던 다른 환자와 보호자가 사내에게 '조용하시라', '응급실에 와서 무슨 행패냐'며 항의했기 때문이다. 다른 환자와 보호자가 나에 비해 육체적으로 만만해 보였는지 사내는 그들에게 욕설퍼붓고 허공에 발길질과 주먹질을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환자와 보호자 역시 사내에게 화내며 고함쳤다. 경찰을 부를까 망설였으나 다른 환자와 보호자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까 걱정되어 문제의 사내를 병원 밖으로 격리시키는 선에서 일단락시켰다. 

 2.
 중세 내내 동유럽을 지키는 방파제였던 비잔틴 제국이 몰락하자 이슬람 세력, 정확히 말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군대가 발칸 반도에 몰아쳤다. 동유럽의 왕과 귀족은 저항했으나 기독교 세력은 카톨릭과 정교회끼리도 단합되지 않아 오스만 투르크의 칼을 막아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레판토 해전에서 기독교 연합함대가 승리하고 빈 공방전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승리할 때까지 동유럽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그래도 그 와중에서 몇몇은 효율적으로 저항해서 오스만 투르크 군대를 괴롭혔고 '민족 영웅'으로 떠올랐는데 알바니아의 스컨데르베우와 왈라키아의 블라드 3세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블라드 체페슈와 블라드 드러쿨레아 같은 별명으로 유명했던 블라드 3세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터키인 포로가 집히면 산 채로 끝이 날카로운 장대에 꿰어 죽을 때까지 방치하고 반역자들 역시 잔인하게 처형했다. 후에 드라큘라 백작을 탄생시킨 블라드 3세의 그런 행동에는 원래 싸이코패스란 가설과 압도적으로 우세한 오스만 투르크 군대에 맞서기 위해 벌인 심리전이란 가설이 각각 존재한다. 어쨌거나 블라드 3세는 탁월한 군사 지도자일 뿐 아니라 유능한 통치자였는데 다만 통치 역시 관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 날 블라드 3세가 왈라키아 전체의 부랑아와 장애인에게 잔치를 베풀테니 모이라는 포고를 내렸다. 무시무시할 뿐 아니라 집요한 블라드 3세라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고 또 공작이 정말 잔치를 베풀것이라 기대하기도 해서 정말 많은 부랑아와 장애인이 모였는데 당연히 블라드 3세는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잔치를 베푸는 대신 블라드 3세는 그들을 모두 처형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오스만 투르크 군대와 맞서 싸우는 것에 도움은 되지 않고 방해가 될 뿐이라서 제거해야 한다'가 블라드 3세의 이유였다. 

 물론 블라드 3세가 정말 그런 이유를 내세웠는지 확실하지 않다. 아예 블라드 3세가 왈라키아의 부랑아와 장애인을 그런 식으로 제거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블라드 3세에 대한 전설과 민담은 너무 많아 그나마 사실적 토대가 있는 것과 아예 허구인 것을 감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블라드 3세 같은 해결책을 얘기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특히 얼마 전 정신질환자가 자신의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는 사람들 가운데 노인, 여자, 아이를 골라 흉기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신질환자와 악질적인 범죄자를 블라드 3세 방식대로 처리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많아졌다. 물론 그들이 아직 다수는 아니며 심지어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런 방식은 해결한 문제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뿐이다. 덧붙여 블라드 3세 역시 영웅적으로 투쟁했으나 결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패배하고 죽음을 밎이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똑똑히 아는 나조차 응급실에서 그 방화 살인범과 비슷한 부류를 만나면 섬뜩하다. 그리고 텔레비젼에 공개된 방화살인범의 얼굴과 그 아침에 응급실을 찾아 난동부린 사내의 얼굴은 형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비슷했다. 단순히 닮았을 뿐 아니라 그 눈빛이 너무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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