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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Aug 06. 2019

응급실 일기

응급 증상


 1.
 '열흘 전부터 힘없고 입맛이 없습니다.', '3주 전부터 가끔씩 기침합니다.', '배가 아프지 않은데 답답하고 소화가 잘 되지 않아요.', '그냥 머리가 흐리멍텅하고 맑지 않아요..', '특별히 아픈 것은 없는데 웬지 앞으로 아플 같은 기분이에요.' 

 응급실에 내원하는 환자 상당수는 위와 같은 증상을 호소한다. 응급실을 찾은 것으로 미루어 본인의 불편과 고통은 작지 않겠으나 엄밀히 말해 응급 증상은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최종적으로도 응급 질환으로 판명되지 않는다. 물론 한층 더 당혹스러운 사례도 종종 있다. 

 '정정하시나 연세가 많으니 정밀 검사 해주세요.', '아픈 곳은 없으나 머리부터 발 끝까지 MRI 한번 밀어 주세요. CT는 방사선이 있다고 하니 거부합니다.', '요즘 열정이 사라졌으니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주사 한번 주세요.', '건강검진 통지가 나왔는데 외래로 오기 귀찮으니 응급실로 입원해서 시행하고 싶습니다.'

 재미있게도 이런 요구는 주말, 공휴일, 연휴에 집중된다. '오랜만에 고향에 왔는데 부모님께 필요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혹은 '직장인이라 평소에는 바빠 연휴에 모든 검사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같은 이유가 전형적인 사례다. 꼭 같은 사례는 아니나 얼마 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응급실 침대에 앉은 남자는 내 또래였고 키는 170cm 근처였다. 마르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비만하지도 체격이었다. 다만 '탄탄하다',' 건장하다', '다부지다' 같은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 상대는 육체적으로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옷차림 역시 약간 묘했다. 시쳇말로 '아재의 유니폼'인 등산복 바지를 입었고 상의는 올올히 짠 황색 스웨터에 카키색 점퍼를 입었는데 아주 불량하지는 않았으나 결코 단정한 복장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의 의무기록은 의학적이지 않은 부분에서 대단히 화려했다. 그는 지난 수년간 7번 응급실을 찾았고 가운데 2번을 제외하면 예외없이 욕설하거나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가 난동부린 5번 가운데 2번은 내가 근무하던 때였는데 아직도 그가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그때 마침 내가 바빴거나 귀찮아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듯 했다. 

 어쨌거나 이번에 그가 응급실을 찾은 이유는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보행자 교통사고는 아니었고 그가 승객으로 탑승한 차량이 다른 차량과 부딪힌 사고였다. 이학적 검사와 신경학적 검사 결과 심각한 이상은 관찰되지 않았다. 머리를 부딪히지 않았고 두통이나 어지러움도 없었다. 팔다리와 몸통에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고 굳이 따지면 경미한 요통이 있었다. 나는 요추 X-ray를 시행하기 앞서 한 가지 사안을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현재 진찰 결과로는 심각한 이상이 관찰되지 않습니다. 요통이 있어 X-ray를 시행할 계획입니다만 골절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따라서 골절 같은 심각한 이상이 관찰되지 않으면 응급실에서는 진통제를 투여하고 정형외과 외래에서 진료를 이어가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미리 말씀드리는데 골절 같은 손상이 발견되지 않는 단순 타박상이나 염좌로는 응급실을 통한 입원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교통사고의 경우 골절이나 내부 장기 손상 같은 심각한 이상이 확인되지 않는 단순한 타박상 혹은 염좌만으로도 무조건 입원을 요구하는 환자가 종종 있어 X-ray나 CT를 처방하기 앞서 미리 설명해야 한다. 특히 환자처럼 어떡하든 꼬투리 잡아 난동부릴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게는 더욱 미리 그렇다. 물론 그럴 경우 그 설명을 꼬투리 잡아 난동부릴 가능성이 높지만. 

 "아니! 뭐라고! 야, 임마! 네 가족 같으면 그런 말이 나와! 차가 완전히 박살났다고! 내가 말야. 몸은 멀쩡하지만 차가 박살났는데 의사란 새끼가 싸가지 없게 말하는 것 좀 보소!"

 그는 머리에 쓰고 있던 낡은 야구모자를 바닥에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최대한 위협적으로 보이길 바랬고 응급실을 공포로 채우고 싶어했다. 괘씸하면서도 불쌍하고 경멸스러우면서도 측은한 행동이었는데 나는 이미 그런 행동을 예상했다. 

 "일단 사회에서 업무적으로 만난 사람끼리는 기본적으로 존칭을 사용하고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불혹 넘은 분께서 폭언과 욕설을 입에 담는 것을 보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나는 옅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가족에 대해 언급하셨는데요. 일단 저는 가족이나 지인을 일반 환자와 다르게 대우하는 부도덕한 인간이 아닙니다. 환자분께서 늘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일을 처리하기에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덧붙여 제 가족은 응급실에서 육두문자를 내뱉고 난동부리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두고서 교양 혹은 상식이라 부릅니다."

 환자는 당연히 폭발했다. 건달이라고 부르기에 조잡하고 졸렬한 부류, 시쳇말로 '양아치'란 사람과 대화할 때 굳이 똑같이 욕설을 퍼부을 이유는 없다. 그는 당장이라도 덤빌 듯 응급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띤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겨우 170이 되는 키에 등산복 바지와 카키색 점퍼를 입은 불량스런 중년 남자와 비슷한 또래에 짙은 남청색 근무복을 입고 청진기를 목에 둘렀으나 180cm가 넘는 키, 빡빡머리에 레슬링 선수처럼 굵은 목, 딱 벌어진 가슴을 지닌 건장한 남자가 서로 마주하는 상황에서는 키 작은 쪽이 난동 부릴수록 불쌍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뿐이다. 

 "뭐, 이 새끼야! 차가 다 부셔졌다고! 나는 멀쩡하지만 차가 다 부셔졌다고! 그러니 입원시켜야지! 이 새끼, 의사란 새끼가 기본이 없네! 이 XX 같은 놈아!"

 나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차가 부셔졌다니 안타깝군요. 그러나 여기는 정비소가 아니라 병원입니다. 차의 손상 상태는 자동차 정비소에서는 문제가 되겠으나 병원에서는 신체적 손상을 다룰 뿐입니다. 본인도 인정하듯 다행히 진찰 결과 육체적 손상은 경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X-ray 등 검사 결과 경미한 손상일 경우 입원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예상대로 중년 남자는 한동안 욕설을 퍼붓고 난동부렸다. 죽여버리겠다. OO동에 오지 마라. 여기가 OO동이면 넌 죽었다. 재미있게도 응급실에서 난동부리는 교양 없는 사람, 시쳇말로 양아치에 해당하는 부류의 독창성은 정말 끔찍하다. 같은 협박과 욕설이라도 신선하고 창조적인 표현이 있을 텐데 그런 부류의 협박과 욕설은 지나치게 획일적이다. 그의 욕설과 협박을 녹음해서 경찰을 부르고 진료방해로 사건처리할까 잠깐 고민했는데 잠시 후 그는 사라졌다. 다만 그는 분풀이로 응급실 밖 도로에 있는 주차금지 표지를 걷어찼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플라스틱으로 된 구조물이었으나 비어 있지 않고 안에는 모래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과 실제 질환이 꼭 맞아 떨어지지 않을 때가 가끔 있다.

 2.
 환자는 가족과 함께 걸어서 응급실에 들어왔다. 호흡곤란도 없고 특별히 힘든 걸음 걸이도 아니었다. '어디가 불편하시죠?'란 나의 물음에 그는 '1달 동안 기침하고 나니 목이 아프다'고 대답했다. 그는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응급실 침대에 앉았고 간호사가 측정한 혈압, 체온, 맥박, 호흡수는 정상 범위였다. 그때까지 특별히 진단받은 질환은 없고 1달 전부터 기침과 가래가 있어 인근 의원에서 치료했으나 증상이 지속되었고 아침부터 목 아랫 부분이 아파 내원했다고 진술했다.  

 "1달 전부터 기침으로 인한 통증은 응급실에서 완벽한 진단이 어렵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청진을 시행했다. 다행히 청진 결과 특별한 이상은 관찰되지 않았다. 1달 동안 기침이 있은 후 목 바로 아랫 부분 가슴에 통증을 호소하는 증상은 성대나 후두가 자극받거나 경미한 염증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묘하게 찜찜했다. 왼쪽 가슴의 쥐어짜는 통증 같은 심근경색이나 협심증의 전형적인 증상은 확인되지 않았고 호흡곤란과 식은땀도 없었지만 콕 찍어 말할 수 없는 불길함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심전도를 시행했다. 

 심전도 결과는 머리를 쭈삣거리게 만들 만큼 심각했다. 심전도에는 급성 심근경색 때 나타나는 ST 분절 상승이 확인되었다. 나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급히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심근경색에 해당하는 증상을 호소하지는 않았으나 급성 심근경색은 종종 전형적이지 않은 증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전도를 시행했는데 안타깝게도 환자는 기침으로 인한 통증이 아니라 급성 심근경색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당장 심혈관조영술을 시행해야 합니다."

 나는 환자에게 니트로그리세린 설하정, 아스피린, 플라빅스를 경구약으로 투여하고 몰핀(morphine)을 정맥 주사로 투여했다. 그리고 심장내과 당작의사와 심혈관 조영술 팀을 호출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환자가 의식을 잃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급성 심근경색 환자가 갑작스레 의식을 잃거나 간질 발작을 하면 심실세동(ventricular fibrillation)이 원인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상대로 환자와 연결된 심전도 모니터에는 심실세동의 어지러운 곡선이 나타나고 있었다. 

 "심실세동이에요. 제세동합니다. 150J!"

 나는 간호사에게 소리쳤다. 간호사는 제세동기의 전극에 젤을 발라 나에게 건넸다. 나는 제세동 전극을 환자의 흉골과 왼쪽 가슴 바깥 부분에 부착시켰다.

 "클리어!"

 환자에서 손을 떼라는 신호와 함께 제세동기의 버튼을 눌렀다. 전기충격이 전해지자 환자의 상체가 크게 들썩였다. 다행히 심전도 모니터에는 심실세동의 어지러운 곡선이 사라지고 규칙적인 리듬의 선이 관찰되었다. 심실세동 후에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해 기관내삽관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나 환자는 바로 명료한 의식을 회복했다. 

 "급성 심근경색 때 동반되는 심실세동이란 부정맥입니다. 심장근육에 산소와 영양을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막혀 발생한 손상이 원인입니다. 그래서 심실세동은 심장 근육의 손상이 매우 심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혈관 조영술이 준비되면 즉시 시행하겠지만 예후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예후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는 일반인이 알아듣기 힘들 가능성이 높은 완곡한 표현이라 다시 덧붙였다. 

 "다시 말해 시술받아도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심전도에서 ST 분절 상승이 확인되고 심혈관조영술을 위해 심혈관센터로 옮겨지기까지 15분 남짓한 시간 동안 환자는 2차례 심실세동을 겪었다. 다행히 두번재 심실세동에서도 1차례 제세동으로 규칙적인 심장 리듬을 회복했다. 심혈관센터로 옮기는 과정에서도 혹시 다시 심실세동이 발생하지 않을까 제세동기를 준비해 동행하며 마음 졸여야 했으나 다행히 심실세동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심혈관조영술 결과 환자는 3개의 큰 관상동맥 줄기 가운데 하나가 완전히 막힌 상태였다. 다행히 시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3.
 고통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래서 실제로 심각한 질환이 진행되어도 호소하는 증상은 대수롭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심지어 재앙이 절정으로 치닫기 전에는 혈압, 맥박, 호흡수, 체온 같은 객관적 지표도 정상일 때가 드물지 않다. 혈액검사 결과 역시 절대적이지 않다. 윗 글에서 묘사한 급성 심근경색 환자도 심장효소 수치는 정상 범위였다. (심장효소 수치는 심장 근육이 손상되면 상승하나 급성 심근경색이 발생하고 최소한 몇 시간 이상 지나야 혈액검사에서 수치 상승이 나타난다) 따라서 임상의사는, 특히 응급실에 근무하는 의사는 환자에게 면밀한 관심을 기울이고 늘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를 완벽히 해결할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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