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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Nov 29. 2019

응급실 일기

휴대폰 살펴보기

휴대폰 살펴보기

1.
낡은 휴대폰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어플리케이션은 정리없이 다운받은 순서대로 어지럽게 화면에 널려 있었다. 문자도 마찬가지여서 가족이나 지인과 주고 받은 문자 사이에 삭제하지 않은 광고성 문자들이 끼어 있었다. 보호자를 찾기 위해 확인한 문자의 내용은 점입가경이었다. 문자의 내용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우선 가족 혹은 가까운 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 달라'는 요구와 '절대 빌려 줄 수 없다.', '지금껏 네가 한 짓부터 생각해라'는 반응이 주된 내용이었다. 다음으로 불법 도박 사이트 개설자 혹은 불법 도박장-속칭 하우스- 관리자와 주고 받은 문자는 '돈을 마련했으니 끼워 달라', '사이트가 광고와 다르니 사이버 머니를 환불해달라'는 일방적 요구와 그에 대한 욕설 섞인 반응으로 구성되었다. 그 문자만으로도 퇴락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자신과 주변 모두에게 악랄한 삶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어 안타까운 동정과 싸늘한 경멸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러나 감상은 거기까지. 보호자를 찾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가족으로 추정되는 문자 가운데 그나마 우호적인, 솔직히 말해 가장 덜 적대적인 것을 골라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이른 새벽이라 당연히 전화 연결은 쉽지 않았다. 나는 행정직원에게 '계속 전화해서 보호자가 연결되면 알려달라'고 얘기하고 환자에게 돌아왔다.

환자는 다소 고통에서 벗어난 표정이었다. 호흡곤란과 식은 땀도 확인되지 않았다. 아직 혈압도 정상 범위였다. 언뜻 환자는 회복한 것처럼, 중대한 고비를 넘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두 몰핀(morphine, 아편 성분의 강력한 진통제)이 만든 착시일 뿐이다. 환자의 관상동맥(coronary artery, 심장 근육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은 주요 부분이 완전히 막힌 상태였고 혈액이 차단되어 산소를 공급받지 못한 심장 근육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체 심장근육이 받은 손상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면 심장은 정상적인 펌프질을 하지 못하고 기괴하게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고 곧 완전히 멈출 것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이 닥치기 전 막힌 관상동맥을 뚫어 혈액 공급을 회복시키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물론 그 시점에서는 기다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몰핀을 정맥주사로 투여했고 아스피린과 플라빅스를 경구약으로 복용시켰으며 심장내과 당직의사와 심혈관 조영술 팀도 이미 호출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심장내과 당직의사를 호출하고 15분이 경과한 시점,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부터는 20분이 경과한 무렵 심혈관조영술을 시작할 수 있었고 환자는 성공적으로 회복했다.

2.
119 구급대의 이동식 침대에 다가가자 강렬한 술냄새가 풍겨났다. 환자의 얼굴은 취기로 벌겋게 달아 올랐고 '술을 마시고 나니 가슴이 쓰리다'고 호소했다. 혈압, 맥박, 호흡수, 체온 같은 생체 징후(vital sign)는 정상 범위였고 의식은 비교적 명료했다. 인적 사항을 확인한 행정직원이 전산시스템에 환자를 등록하자 화려한 과거기록이 드러났다. 최근 정형외과에 수차례 방문했던 환자는 외래에서는 그럭저럭 지시에 따랐으나 입원하면 음주와 무단 외출을 반복했다. 또 한번 입원하면 더 이상 입원 치료가 필요없어도 퇴원을 거부했고 병원비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고 민간 보험으로도 이런 저런 문제를 일으킨 이른바 '블랙 환자'에 해당했다. 그런 화려한 전력을 지닌 환자가 잔뜩 슬취한 상태로 응급실을 방문했으니 행정직원은 당연하고 의료진도 선입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나 역시 '술을 마시고 나니 가슴이 쓰리다'는 말에 '매일 술을 마시니 가슴이 쓰릴 수 밖에 없습니다'고 응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단 심전도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검사 결과 이상 없는 것으로 결론나면 환자는 진료비를 내지 않으려 온갖 잔머리와 추태를 부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경우 진료비를 받지 못하면 의사는 몰라도 행정직원이 받는 압박은 상당하다. 이런 사정이 '응급실에서 방치된 주취자 사망', '진료 거부당한 노숙자 사망' 같은 뉴스가 언론에 보도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물론 그런 뉴스를 무조건 '행정 문제에 휘둘린 의료진의 나약함' 때문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자세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알지 못하면 해당 임상의사가 합리적으로 결정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모든 환자에게 무턱대고 검사를 시행하는 것도 행정 문제에 휘둘린 판단을 내리는 것만큼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주취자나 블랙 환자란 이유만으로 적절한 검사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는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 나는 심전도 검사를 처방했다. 행정직원이 난색을 표명하면 '환자에게 진짜 문제가 있다면 너와 나 모두 신문과 TV에 나오고 감방갈 가능성이 높다. 너나 나나 모두 월급쟁이에 지나지 않는데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으냐?'고 말하면 된다. 후에 경영진에서 지적하면 '응급실 진료비 몇 푼을 받지 못하는 것과 그 몇 푼을 아끼려다 의료사고에 휘말려 병원 평판은 평판대로 나빠지고 합의금은 합의금대로 왕창 물어내는 것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합니까?'라고 얘기하면 된다. (물론 우리 병원 경영진은 한번도 임상의사의 판단에 간섭한 적이 없다)

솔직히 심전도를 처방할 때도 나는 환자에게 정말 심각한 의학적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나조차도 주쥐자이며 블랙 환자라는 선입견에 휘둘려 무엇인가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다소 편집증적 시각에서 심전도를 시행했을 뿐이다. 그런데 심전도 결과는 경악스러웠다. II, III, aVF에서는 ST분절 하강(ST depression), V2-V6까지는 ST분절 상승(ST elevation)이 관찰되었는데 모두 급성 심근경색에서 나타나는 심전도 변화다. 나는 즉시 환자에게 몰핀 5mg을 정맥주사로 투여하고 아스피란과 플라빅스를 경구약으로 복용시키면서 심장내과 당직의사와 심혈관 조영술 팀을 호출했다.

그런 다음 보호자를 찾기 위해 환자의 동의를 얻어 휴대폰을 살펴봤다.

3.
관상은 과학적이지 않은 미신이다. 그러나 아주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니다. 살면서 짓는 표정 뿐 아니라 뇌의 어느 부분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얼굴 근육의 발달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물을 넘은 성인이라면 얼굴 근육의 특징을 통해 성격이나 직업을 추측하는 것이 아주 황당하지는 않다. 그래서 서로 정보가 제한적인 과거에는 상대를 대략 파악하는 방법으로 관상이 주목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정보가 풍부하다 못해 불필요할 만큼 넘쳐나는 현대에 '관상'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은 무엇일까? 나는 휴대폰이야말로 현대의 관상이라 할만한 물품이라 생각한다. 뇌의 어느 부분을 사용하고 살면서 어떤 표정을 짓느냐가 얼굴 근육에 반영되듯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와 문자는 휴대폰 주인의 일상을 특징적으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른 새벽 '휴대폰 살펴보기'는 씁쓸했다. 지금껏 의식 없는 상태로 도착한 환자, 의식은 있으나 상태가 너무 나빠 스스로 연락할 수 없는 환자, 홀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된 환자를 담당하며 보호자를 찾기 위해 수없이 많은 휴대폰을 뒤적였으나 그 환자만큼 삶이 밑바닥의 가장 막다른 곳에 도달한 경우도 드물었고 그 환자만큼 이기적이고 자신과 주변 모두에게 파괴적인 사람도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누구보다 편견과 선입견을 경계해야 하는 응급의학과 의사인 나조차 그 환자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떨쳐버리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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