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동 제로웨이스트 쌀집, 경복쌀상회의 복씨와 제비들의 살롱
어느날 오래된 동네 쌀집에서 아름다운 제로웨이스트 쌀집으로 변화한 경복쌀상회. 각자 용기를 들고 와서 ‘원하는 만큼, 버릴 것 없이’ 곡물을 살 수 있다. 용기가 없는 손님에겐 공병이나 쌀포대를 재활용해서 만든 장바구니를 빌려주기도 하신다. 항상 환대해주시는 사장님과 대화하고 나면 여행자들은 이제야 이 동네가 진짜 사람이 사는 동네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제비의 일상여행에서 슬쩍슬적 들었던 사장님의 이야기가 재밌어서 제대로 된 자리를 열어보기로 했다. 이 공간에 켜켜이 쌓여왔을 동네와 쌀집 이야기를, 쌀포대처럼 가득할 사장님의 이야기보따리를 함께 풀어내고 싶었다.
작은 포스터를 만들었더니 쌀집 유리창에 붙여주셨고 당근마켓과 sns에 올려보았다. 궁금했던 가게라며 당근마켓에서 신청한 이웃분, 멀리 다른 지역에서 토요일의 늦잠을 포기하고 온 사람들, 멀어 오진 못하지만 꼭 물어봐달라며 댓글로 질문을 남긴 사람들이 있었다. 흔쾌히 수락해주시고 며칠 전부터 가게 가운데의 쌀포대들을 정리하며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나눌 공간을 마련해주신 사장님의 마음으로 열린 자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들뜬 마음으로 가득했다.
경복쌀상회의 복씨와 함께한 제비살롱은 문을 여는 순간부터 즐거웠다. 언덕 위 집에서 앉을 의자를 들고 내려왔고 사장님이 판자 위에 황금빛 보자기를 깔아 마련해주신 상 위에 사러가에서 사온 과자들을 세팅했다. 일회용품을 줄이려 챙겨온 리턴미컵에 포도주스까지 따르고 나니 다들 꼭 로마의 다과상 같다며 함께 웃으며 축배를 들었다. 멀리 원주에서 선물보따리를 들고 찾아온 이매진피스 원영의 진행으로 제비살롱에 깃든 여행자들의 소개를 나눈 뒤 본격적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았다. 복씨라고 불러달라며 제비살롱의 이야기문을 여신 김형진 사장님은 쌀포대처럼 가득한 이야기를 풀어내셨다.
복씨: 안녕하세요 연희동의 따뜻함을 담당하고 있는 쌀집 아저씨 복씨입니다. 처음에 시원씨가 오셔서 ‘제로웨이스트 쌀집이 인상적이라 여행할 때 소개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어요. 사실 낯선 분이셨는데 거부감은 없었어요. 쌀집은 원래 옛날부터 누구든 와서 편하게 들려 대화하는 동네 사랑방이었어요. 저희 어르신은 누가 오시면 물이라도 드리고 환대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빌려주고 없으면 내어주고, 금전적인 문제를 호소하면 외상 해주고 이러셨던 걸 쭉 봐왔거든요. 그래서 외부에서 누가 오시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고 신세대들이 변화를 위해 시도해나가는 것을 지원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우리는 사고가 올드해서 변하긴 쉽지 않지만 변하려는 사람들을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시면 따뜻하게 반겨드리고 소개해드렸더니 좋으셨던지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셔서 이 자리에 오게 됐네요(웃음). 늘 여행오시는 분들 보면 제로웨이스트나 공정무역 실천하시는 분들이고 또 동네여행이니 잘 해드려야 좋은 기억으로 남잖아요. 그래서 따뜻함을 생명으로 복씨가 일하고 있습니다(모두 환호).
제비: 어떻게 연희에서 쌀집을 하게 되셨나요?
복씨: 원래는 경상북도 상주가 고향이예요. 지금 3대째 이어받아 쌀집을 하고 있는데요. 60년대 초반엔 쌀이 부족해 사람들이 일부로 품질좋은 쌀을 돈주고 찾아서 샀어요. 친척분 중 쌀집을 시작해서 잘된 분이 계시고 그걸 장인어른이 이어받아 연희동에서 쌀집을 시작하셨어요. 사러가 쇼핑센터가 있기도 전이었어요. 원래 여긴 큰길에 개천이 흐르고 사러가 자리에는 연희 시장이 있을 때였어요. 장인어른이 오래 하시다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다음 사람을 고르셨어요. 그당시 병간호 하며 돕고 있었는데 아들들은 안한다고 하니 제게 제안하셨어요. 원래 현대자동차 서비스에서 교육담당으로 일했는데 40살이 됐을 때였어요. 당시엔 IMF라 정리해고 위험도 있었고 사오정에 오륙도라고. 45세가 정년이고 5,60대까지 하면 도둑이란 여론이 팽배하던 때였어요. 그래서 40대를 맞아 전환기를 고민하다 쌀집을 이어받은지 17년 됐습니다.
제비: 제로웨이스트 쌀집으로 변화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복씨: 오랜 시간 쌀집을 해오며 매너리즘에 빠져있을 때였어요. 변화를 고민하고 있었죠. 가족들과 <인간의 조건_쓰레기 없이 살기>라는 다큐를 보고 환경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어요. 원래 미니멀라이프에도 관심이 있어 가족들과도 여러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때 보틀팩토리 정다운 대표님이 제안을 해오셨어요. 혼자 가기 어려운 길을 누군가 와서 함께 하자 손 내민 거잖아요. 잘 몰라도 잘 따라만 가면 그 방향으로 갈 수 있겠다 생각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함께 하겠다고 했습니다. 리모델링을 하면서 옛 시트지 싹 뜯어내고 새로 디자인하고 운영 방식도 바꿨어요. 인원 지원도 많이 해주셨고 저도 조금 부담해서 지금의 제로웨이스트 쌀집으로 함께 바꾸었어요. 비닐 포장을 없애고 병이나 장바구니 대여까지 조금 복잡하긴 했지만 바꾼 뒤 유어보틀위크 행사도 있어 최대한 성의를 보이자고 마음 먹었어요.
제비: 예전 간판엔 경‘북’쌀상회라 써있고 개사료 등 다양한 걸 파셨는데 리모델링 후 경‘복’쌀상회가 되고 여러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복씨: 처음 쌀집 여신 분이 고향이 경북이라 경북상회라고 지으셨어요. 이번에 제로웨이스트로 리모델링 하는 과정에서 지역색을 빼고 오랫동안 복된 삶을 살고 싶어서 간판과 이름을 바꿨어요. 아직도 어르신들은 경북으로 아실 거예요(웃음) 전엔 개사료도 사람 쌀처럼 20kg씩 벌크로 팔았는데 간소하게 오래 지속하고 싶어서 품목을 줄였습니다.
제비: 변화 후 달라진 점을 느끼시나요?
복씨: 제로웨이스트 쌀집으로 바꾼 뒤, 유어보틀위크가 있었어요. 그때 많이들 와서 참여하셨어요. 원체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니 동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더라고요. 원래 쌀집은 보수적인 공간이었고 주로 어른들이 많이 와서 구매하세요. 그런데 젊은이들이 와선 사진 찍고 구경하니 동네 분들이 어쩐 일이냐고, 어떻게 하는 거냐고 관심가지시더라고요. 동네 분들도 오래 봐온 곳이 바뀌니 관심 갖고 해보시기도 하고요. 사실 예전에 비닐이 없을 떄는 광목 쌀자루, 세면 봉투에 많이 쌀을 사갔어요. 그래서 앞으로 유리병이나 자루 가져와 사시거나 담아서 배달해드겠다 했더니 오히려 옛날에 했던 방식이라고 좋아하셨어요. 중학생들이 단체로 병들고 쌀 사러 체험학습 온 적도 있고 쌀 1,2kg 사러 멀리서 자전거 타고 오시고, 당산동에서 오신 분이 깔대기 주고가시기도 했고요. 젊은 분들이 멀리서부터 찾아오시는 게 신기했어요.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어요. 제로웨이스트는 그 방향으로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강한 변화의 압력이 느껴져요. 그걸 먼저 안 게 젊은 세대 같아요.
제비: 제로웨이스트가 퍼져나가며 숍에 가서 친환경물품을 사는 또다른 소비로 유행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어요. 연희동에선 기본적인 식료품을 무포장 구매하며 쓰레기 없는 일상을 살 수 있어 좋았어요. 쌀집이 기본 옵션을 제로웨이스트로 바꿔주시고 이런 움직임을 환대해주시니 더 즐겁고 편하게 실천할 수 있어 감사해요.
복씨: 제가 어릴 땐 냄비 들고가 음식을 받아와서 외식했던 기억이 있어요. 짜장면집에서 냄비에 짜장만 받아다 밥 비며 먹곤 했었어요. 되로 퍼서 담아주는 곳들이 많고 막걸리도 주전자 들고 가서 받아오고 그런 게 자연스러웠죠.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님이 이웃에 사시는데 동물과 사람이 함께 살고 사람이 동물의 자리를 인정해줘야 역병이 안 든다는 것을 배웠어요. 쓰레기섬 사진이나 쓰레기에 감겨 죽은 해양생물들 사진 보면 안타까운 마음도 들고요. 최소한 실천하시는 분들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생각해요. 도움이 되면 더 좋으니 왔을 때 더 반갑게 맞이해드리고요. 사회적으로 바람이 불고 있는 때 같아요. 연예인들도 텀블러 많이 들고다니더라고요. 저도 연예인은 아니지만 텀블러 들고 다니고 있어요.
제비: 이제 연희동 연예인이신 것으로 하죠(웃음) 오랜 시간 쌀집을 지켜 오신 게 대단해요. 쌀집을 하며 좋았던 순간, 지속해나가시는 힘은 무엇으로부터 오시는지 궁금합니다.
복씨: 변화를 싫어하고 하던 걸 지속해나가는 게 경상도 사람의 속성인 것 같아요. “별거 없어. 하던 거 해. 좀 덜 벌면 어때. 밥 먹고 살면 돼”하시던 어르신들의 말 따라 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왔어요. 예전 장인어른이 하실 땐 쌀집 평상이 동양화와 약주 좋아하시는 어르신들 사랑방이었어요. 지금은 평상을 빼서 민생포차가 새로운 사랑방이 됐지만, 저도 약주 좀 하고 한량 기질이 조금 있어요. 가족행사 있으면 가게 문 닫고 어디 놀러가고 싶으면 개인 사정으로 닫는다 하고 놀러가기도 하고요.
제비: 이 동네는 다들 일찍 닫고 자주 쉬시더라고요!
복씨: 개인사정으로 닫는다 하면 친구들 만나 약주 한잔 하러 근처에 놀러갔을 수도 있으니 전화 한번 해보세요. 하하하.
제비: 젊은 사람들은 쌀을 동네 가게보단 온라인 택배로 많이 시켜먹고 코로나도 있어 타격이 크셨을 것 같아요.
복씨: 어쩔 수 없는 데미지인 것 같아요. 오래 거래해오신 어른들은 많이 돌아가셨고 3-40년 거래해온 기존 거래처들도 코로나로 영업상의 손실이 커서 고민하고 계십니다. 원래 분식집, 김밥집, 중국집 이 셋이 제일 늦게 망하는 식당이예요. 이곳들이 망하면 진짜 우리도 고민해야 하고 위험한 건데, 다들 경력으로 버텼지만 이젠 정리해야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는 시점이예요. 코로나로 피할 수 없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어 고민이 많습니다. 쌀은 가장 보수적인 산업인데 위기라서 어떻게 쌀집을 유지해나갈 수 있을지 지혜를 구하며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비: 예전엔 가게에 붙어있는 오랜 연희동지도를 보고 배달다니셨다고 들었던 기억이 나요, 지금 경복상회 쌀로 요리하는 곳, 단골집은 어디인지 쌀지도가 궁금합니다.
복씨: 이 동네에선 연희동 쌀국수, 백암순데, 이품, 엄마식탁, 중국집 몇군데가 있고 연남동에서부터 응암동까지 배달해드리고 있어요.
제비: 엄마식탁에서 밥먹고 있는데 사장님이 쌀배달 오시는 걸 봤어요. 경복상회 쌀인걸 알고나니 괜히 밥이 반갑더라고요. 동네 가게들에서 사오신 재료로 요리하신 연희동산 음식!
제비: 직접 다 배달을 다니셨으니 동네 분들 사정을 다 아셨겠어요. 최근에도 비극적인 기사를 봤는데 밥 해먹을 쌀이 떨어져 사야할 때, 그걸 못사면.. 없는 사람들에게는 쌀이라는 게 정말 마지막 선인 것 같아요.
복씨: 만약 주변에 정 어려워 쌀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을 혹시 아시면 저한테 신고를 좀 해주세요. 어려운 상황일 땐 제가 그냥 제공을 해드리고 싶어요.
제비: 감사한 말씀이네요. 어려울 때 동네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곳,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관계들이 있는 게 삶에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이야기를 나눈 뒤에는 원영의 제안에 따라, 제비살롱에 참여한 제비들에게 질문을 넘겨 각자 느낀 “쌀 한톨의 무게”와 “이야기를 나눠주신 복씨에게 감사의 한마디”를 포스트잇에 써서 나누었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느낀 쌀 한톨의 무게는 따뜻한 밥 한끼의 무게.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의 무게. 쌀의 여행길에서 가닿은 모든 삶의 무게, 자연과 사람의 시간 1년의 무게. 한 사람의 생명의 무게였다.
제비살롱 끝에 복씨는 이런 문장을 적어주셨다. “쌀 한톨의 무게는 oo 무한대. 서로의 생각을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즐거운 시간을 누리며 강건한 일상을 위해서 늘 함께하겠습니다.” 함께 포스트잇에 적은 내용을 낭독하고 복씨의 마음에 들어온 순서대로 원영님의 선물을 나누며 제비살롱의 문을 닫았다. 인사하고 나오는 길, 협력업체인 엄마식탁에 가서 밥 먹고 경복상회에서 보냈다고 하라며 권해주셨다. 엄마식탁에서 따뜻한 비건 밥상을 먹고 있는데 배달하러 갔던 복씨가 연희동에서 유명한 베이글을 한보따리 사와 선물해주셨다. 엄마식탁에서는 지난번 제비살롱을 함께 했던 정희전 사장님이 주방에서 나와 반가이 맞이해주셨다. 동네에서 연결되고 깊어지는 관계에 마음이 따스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