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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Apr 02. 2020

어학연수 안 가본 이야기

종로 3가에 추억이 많아요

아빠는 나를 서울로 보낼 만큼 투자 가치가 있을지를 고민하셨다.


정년퇴직이 가까워 올 수록 아빠는 노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셨다. 서울의 물가는 부모님이 생각하셨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나와 고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친구들의 80% 이상은 지방 국립대를 선택했다. 지방의 여건상 서울로 올라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특히 여자가 혼자 서울로 올라온다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다들 컸다. 아무리 치안이 좋다는 한국이지만 0.1%의 확률이라도 그 피해자가 내가 된다면 그 확률은 내 인생에 있어서 0.1%가 아닌 100%가 돼 버리는 거니까...


아빠는 본인처럼 내가 선생님이 되길 바라셨지만 엄마는 내가 선생님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셨다. 엄마가 오빠 사주를 보러 점집에 갔을 때 점쟁이가 내 생년월일까지 물어봤다고 한다. 점쟁이 왈 나는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둬도 알아서 살아가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선생님을 하든 군인을 하든 직장인이 되든 신경 안 써도 될 거라고 좋게 얘기를 했다고 들었다. 그때 당시 미성년자인 나한테 점쟁이가 악담을 퍼붓겠냐만은 그런 말에 용기를 얻어서인지 엄마는 나를 과감히 서울로 보냈다.

 

나는 처음으로 독립을 하게 돼서 매우 좋았다. 좁아터진 관사에서 벗어나서 나만의 공간에서 살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면 꿈에 그리던 로마와 파리에 "당연히" 가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대학 4년 동안 틈만 나면 동기들과 경쟁하듯이 자격증을 땄고, 주 3일은 종로 3가에서 영어 학원을 다녔다. 학원을 마치고 나면 원룸 근처에 6개월씩 등록한 헬스장에서 무료 요가 수업도 듣고 헬스도 했다. 


해외여행은커녕 속지가 깨끗한 여권만 가지고 있던 내가 어쩌다 보니 해외사업부에서 11년 차로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나는 영어학원을 가는 것이 하루 중 가장 고역이었다. 내 생활비의 절반이 영어학원비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전부 식비로 지출했다. 처음 영어 청취 학원에 등록을 했을 때 그때 당시 가장 유행했던 미드로 수업을 받았다. 빠르게 흘러가는 대화를 듣고 받아 적는 게 어려웠지만 1년 동안 개근하니 1년 후 노트북으로 미드를 볼 때 그동안 헛돈은 안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2학년이 되자 대부분의 동기들이 어학연수를 계획했다. 해외에 나가볼 용기도 없고, 그때 당시 많은 정보도 없었던 나는 어학연수를 종로 3가의 한 회화학원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영어회화 수업은 청취 수업보다 훨씬 재미도 없고, 말도 안 되는 게임을 하면서 쌩판 모르는 사람과 영어로 대화를 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본전 생각으로 회화반에서 내가 해야 할 말들을 미리 생각하고 문장을 적어서 갔다. 수업 시작 전까지 책상에 앉아서 해야 할 말을 전부 암기했다. 주 3일 반이었지만 수업 시간 때마다 해야 할 말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는 게 정말 큰 압박이자 스트레스였다. 특히 가장 힘들었던 주제는 "기억에 남는 해외여행"에 대해 짝을 이뤄서 대화를 할 때였다. 


난 해외에 가본 적이 없는데?


이때부터 내 말문은 막혔다. 기억에 남는 해외여행에 대해 말해보라는 주제는 짜증 나게 너무도 자주 등장했다. 나만 제외하고 휴학한 언니 오빠들이나 직장인들은 영국, 프랑스, 중국 그리고 동남아 등등 가본 곳을 기억을 떠올리며 더듬거리면서도 대답을 했다. 둘씩 짝지어서 하는 대화 시간에 나는 해외여행을 가본 경험에 대해 얘기할 거리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다들 나와 짝을 하는 걸 싫어했다. 나는 스스로가 안타깝고 너무 창피했다. 물론 나도 이해는 했다. 왜냐면 그들도 비싼 돈과 귀중한 시간을 들여서 영어로 대화하고 부족한 단어 실력을 늘리려고 온 학생들이었으니까. 짝이 없던 나는 오히려 원어민 선생님과 1대 1로 해외여행 대신 국내 여행으로 주제를 바꿔서 대화를 했다.


만약 지금의 내가 과거 대학생이었던 나를 다독거릴 수 있다면 무슨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


절대 여기서 쫄지 말라고... 넌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앞으로 훨씬 더 많은 해외여행을 가게 될 거야. 지금은 취업 걱정이 많겠지만 너는 졸업 후 해외사업부에 입사를 하게 될 거고 대리가 됐을 때 너는 너한테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임원들과 중남미 출장을 가서 무장한 보디가드들과 멕시코와 브라질 거래처에 가게 될 거야. 그때 처음으로 에스프레소라는 것도 마셔볼 거고 꿈에 그리던 마추픽추에도 올라가서 네가 싸이월드에 적어 둔 버킷리스트 한 개를 더 지우게 될 거야...


먼 미래를 바라보기는커녕 하루하루 재미없게 살았던 소심한 성격의 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면서 상처 받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영어 수업을 새벽 6시로 변경해서도 다녔다. 새벽 6시 수업이라서 새벽 5시 30분에 지하철 첫 차를 타고 종로 3가에 가면 그 전날 종로에만 쓰나미가 지나갔는지 길거리에는 온갖 토사물과 쓰레기가 한가득이었다. 새벽 6시 수업을 신청하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기 때문에 나는 평일 다른 시간대와 같은 가격으로 원어민 선생님과 1대 1로 수업을 했다. 수업을 마치고 다시 원룸으로 돌아와서 30분 간 잠을 자다가 다시 학교에 갔다. 초등학교 때 '남자 셋 여자 셋'을 보며 꿈꿔왔던 대학 생활은 있긴 했던 걸까?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추억거리 하나 없었다.


지금도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 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거의 나를 떠올려 보면 지금의 나는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20대의 내가 짊어지고 있었던 고민은 지금 떠올려 봐도 무시할만한 고민이 아니다. 물론 현재는 또 다른 고민으로 정신을 똘똘 무장한 채 버티고 있지만 20대의 고민과 30대의 고민은 분명히 다르다. 정체돼 있던 저수지에서 어찌어찌해서 흐르는 시냇가로 겨우 빠진 것 같은데 여기서 바다로 나가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있다. 40대가 되었을 때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하루하루에 더 집중하고 재밌게 사는 게 목표였는데 가끔은 이게 맞나 싶기도 하다. 다 잘 될 거야!라는 막연한 생각 하나로 살아가기엔 이 세상의 스케일은 너무도 크고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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