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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Apr 04. 2020

아빠도 싫어서 떠난 아빠 고향 이야기

이제 갈 일이 없게 된 아빠 고향

침대에서 자던 습관이 몸에 익어서 딱딱한 바닥에서 자기가 힘들었다. 옆집에 있던 개가 요란하게 짖는 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닫이 문을 열고 밖을 나와보니 한 남자가 쫓기듯이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나에게 그 남자는 손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었고, 내 오른쪽 이마가 손도끼 날에 깊이 패었다. 순식간에 뜨거운 피가 흘러내리며 나는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고, 이대로 어떻게 사나 하는 공포감에 흐르는 게 눈물인지 피인지 구별도 안됐다. 울고 싶어도 미간을 찌푸릴수록 쥐어짜듯이 나오는 피에 소리 죽이며 울었다. 욱신거리는 이마를 차마 손으로 만져볼 엄두도 못 냈다.

내 옆에서 자던 가족을 얼른 깨워야 하는데, 눈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피로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짖던 개소리마저 이제 들리지 않았다.


너무도 생생했던 악몽이었다. 현실로 돌아왔는데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려서 주무시던 엄마의 숨결에 나는 살아있다는 걸 느꼈다.


D에 가면 악몽을 많이 꿨다. 한창 꿈을 많이 꾸면서 키 클 나이라던 초등학생이었지만 D에서는 아이답지 않은 꿈을 많이 꿨다. 시간이 멈춰있고 지나가던 새도 천천히 날던 곳, D는 아빠의 고향이었다. D는 정말 시간이 멈춘 곳이었다. 할아버지 집에 있던 큰 궤종 시계는 매 시간마다 웅장한 소리를 내며 온 집안을 울렸다. D에 오면 다소 신경이 날카로워지던 엄마는 궤종 시계 소리마저 거슬린다며 시계를 멈춰놨다. 그래서 궤종 시계는 내가 D에 도착한 시간으로부터 D를 떠날 때까지 항상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D로 가는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집에서 D까지 차로 6~7시간 걸렸다. 어려서부터 치아 관리에 엄격하셨던 엄마가 유일하게 크리스마스 때보다 과자를 더 사주셨던 때는 D에 갈 때였다. 그때 집 근처 마트에서 샀던 가지 각색의 과자는 D에서 먹을 비상식량이었다.


 매년 명절마다 D에 가는 건 싫었다. 지금이야 결혼을 하면 외가와 친가에 둘 다 간다고 하지만 우리 집은 명절 때 외갓집을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엄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외출하시고 나면 외갓집에 안부 전화를 하곤 했다. 엄마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의 훈훈한 정과 공동체 의식 그리고 서로 믿고 지내기 때문에 대문도 활짝 열어놓고 산다던 D에 몇 년째 와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대문을 활짝 열어놔서 누구나 지나가면서 할아버지 집을 창 밖에서 들여다 보고, 마음대로 들어오는 게 나는 싫었다. 딱히 볼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기웃거리는 게 어린 나로서는 무섭기까지 했다. 게다가 여자니까 할아버지, 아빠 그리고 오빠와 같이 밥 먹지 말고 상을 따로 차려서 먹으라던 할머니에게 나는 극도의 반항심이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할머니도 여자니까 밥상에 계시지 마시고 나랑 같이 밥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렇게 밖을 뛰쳐나가면 엄마는 몰래 엄마가 따로 싸온 반찬에 밥을 갖다 주셨다. 그때만큼은 적색 6호가 잔뜩 들어간 소시지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푸라면에 계란을 2개씩 풀어서 먹어도 엄마가 크게 뭐라 하지 않으셨다.


물을 좋아하는 나는 아침마다 마을회관 앞에 있던 우물을 내려다보곤 했다. 아직까지 물을 쓰시던 분들이 있는지 우물은 마르지 않았다. 이미 도굴이 됐을 거라던 고인돌에는 항상 말벌집이 있어서 호기심이 많은 내 접근을 매번 막았다. 초등학생 걸음으로도 1시간이면 온 동네 주민들의 집을 방문하고 안부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 집 뒤로 서울에서 한 아저씨가 이사를 왔다. 40대 후반의 아저씨는 이혼을 하고 혼자 D에 내려왔다고 했다. 아저씨는 할아버지 집을 지나칠 때마다 우리에게 안부 인사를 했고, 나도 서글서글한 아저씨가 좋았다. 할아버지 집 거실에서 친척들이 다 같이 모여 있어도 어르신들이 각자 본인 말만 해대는 그 떠들썩함이 항상 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목소리를 크게 높이지 않아도 내 눈높이에서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추석에 D에 갔을 때 할아버지 집 뜰에 큰 평상이 눈에 띄었다. 이 평상 어디서 났냐고 할머니께 여쭤보니 아저씨가 만들어줬다고 말씀하셨다. D에서의 유일한 내 말동무인 아저씨를 보러 나는 내 소중한 비상식량 몇 개를 챙겨서 아저씨 집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뛰어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외치셨다.


그 집 빈집이다. 그 사람 죽었어.


평소 할머니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던 나는 못 들은 척 아저씨 집으로 갔다. 그런데 정말 빈집이었다.


아저씨는 D에서 낚시하는 걸 즐겨했다. 나도 아저씨가 새벽부터 낚시 도구를 챙겨서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로 가는 모습을 여러 번 봤었다. 아마 할아버지의 자전거가 내가 타기에 무겁고 높지만 않았어도 난 수시로 아저씨를 따라서 갔을 거다. 돌아가시던 그날도 아저씨는 평소처럼 바닷가로 향했다. 아저씨를 마지막으로 봤다는 유일한 목격자이자 신고자는 1톤 트럭 기사였다. 그 트럭 기사는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달리는 것을 보고 추월을 해서 가다가 무심코 백미러를 보니 아저씨가 안 보여서 차를 돌려서 가 봤다고 한다. 되돌아가 본 그 자리에는 아저씨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도로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트럭 기사는 그 자리에서 신고를 했고 아저씨는 차가운 도로 위에서 돌아가셨다.


아저씨의 장례식은 조촐했다. 몇 년을 D에서 살았지만 아저씨만 외지인이었다. 서울에 있다던 이혼한 아내와 두 명의 딸은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서글서글하게 웃던 그 아저씨를 떠올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나는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너무도 많이 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사람이 뒤따라오지 않는다고 가던 차를 되돌려서 가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트럭과 자전거의 속력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트럭 기사는 정말 목격자일까? 등등 그때 당시는 되돌린다고 해도 무의미한 나만의 의심이 마구마구 들었다. 장례식 이후로도 할아버지 친구의 아들이었던 트럭 기사를 마을에서 몇 번을 더 마주쳤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나는 D에 다시 내려왔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D는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D에서 유일하게 하나 있는 장례식장은 썰렁했다. 나는 조용히 앉아 있다가 지루함을 못 이기고 할아버지 집까지 걸어갔다. 검은 상복을 입고 흰 리본이 달려 있는 실핀을 머리에 꽂고 30분 이상을 도로를 따라 걸어도 누구 하나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D에는 이제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든 곳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흩날리던 민들레와 파란 벼들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시내에서 마을로 도착했다. 할아버지 집 앞에 있던 배롱나무를 지나서 아저씨 집으로 올라갔다. 


성인이 돼서 마주하게 된 아저씨의 집은 마을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빛이 바래긴 했지만 여전히 지붕 색깔은 다른 집에 비해서 튀었다. 폐가가 되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은 크고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이 폐가가 되어가는 그 집을 보며 나는 이제 아저씨의 얼굴도 잘 기억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의 적막한 분위기가 싫어서 나는 얼른 돌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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