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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Apr 08. 2020

내가 사는 이 곳

2019년 4월 11일에 이사 왔는데 벌써 1년이 됐네... 시간 빠르다


아빠는 서울에 또 분양을 받았다.


평소대로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아빠께서 다소 갑작스럽게 3달 뒤에 이사를 가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당황스러웠고 겁이 났다. 20평대에서 30평대로 이사를 가는 거니 좋아해야 하는 게 맞는데 지금 사는 곳보다 더 북쪽으로 이사를 간다고 하니 막막했다. 그 지역 생활환경이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 아니었다.


기존의 집을 팔고 현재 집에 잔금을 치르면서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빠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신혼부부가 서울에 집을 살 정도의 돈을 모았을 리가 없었다. 우리 집을 보러 오고 가는 신혼부부들을 보며 신혼부부라면 보통 얼마를 모으는지 나는 대강 알 수 있었다.


2019년 4월 11일에 기존의 집은 한 신혼부부에게 전세를 주고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아빠와 엄마는 짐 싸는 스타일로 하루에도 몇 번을 말다툼을 하셨다. 평소 부모님이 다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이번에 부모님이 이혼을 하시는구나 싶었다. 엄마는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이혼을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사를 가기 전까지 아빠는 잔금을 치르지 못했다. 아빠는 은행 대출로 하루가 지날 때마다 몇 만 원씩 빠져나가는 이자 고민에 스트레스를 받으셨다. 당장에 큰돈을 은행에 채워 넣어야 하는데 그 돈이 어디서 날까 싶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나는 회사에서 의도하지 않은 목돈을 받게 됐고 나는 그 돈을 먼저 은행 빚을 갚는데 썼다. 비록 집값에 비하면 거실에 들어간 벽돌 몇 장 값이겠지만 그래도 하루에 이자가 5만 원씩 빠져나가던 부담을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2019년 4월 11일에 드디어 이사를 왔다. 기존의 집에서 출근을 하고 현재 집으로 퇴근을 하는 게 기분이 묘했다. 몇 달간은 지금 집에서 지내면서도 내가 다른 집에 얹혀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퇴근할 때마다 보이는 색다른 풍경이 꼭 소풍 가는 기분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북쪽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북한도 싫어하는 판인데 집 위치가 더 북쪽으로 올라가니 친구들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집 위치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려고 해도 지하철역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사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산에 계신 고모할머니를 집에 초대했을 때도 서울도 아닌 데 이렇게 큰 단지의 아파트가 있냐!라는 말씀을 하셨다.


1년 정도 살아보니 나는 우리 집이 좋다. 이래 봐도 각종 예고에서 가장 입학하고 싶어 하는 학교가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그리고 한 2000보만 더 걸으면 외대도 있고, 스타벅스도 나오고 거기서 천 보 좀 더 걸으면 경희대도 나온다.


아빠가 정년퇴직하기 전까지 아빠의 직업 특성상 발령을 받으면 우리는 무조건 이사를 가야 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우리는 매년 인사발령 시기가 되면 긴장모드였다. 지금까지 2번을 이사를 했는데 이 정도면 굉장히 양호한 편이었다. 어떤 분들은 매년 발령이 나서 가족과 떨어져서 지내는 분들도 꽤 있었다.


지나 놓고 보니 이렇게 이사 다녔던 게 좋은 추억이었다. 그때가 아니었다면 언제 충청도와 전라도에 살아봤을까 싶다. 학교와 직장이 먼 것도 내 팔자에 있는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멀었다. 대학이야 내 선택이었으니까 이건 예외로 치자. 어렵게 취업한 직장도 멀었다. 사실 지금보다 가까운 직장에서 먼저 합격 연락은 왔었는데 현재 직장에서 연봉 100만 원 더 준다는 말에 출퇴근이 멀어도 지금 회사로 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나는 성북구 주민이지만 집은 동대문구와 성북구 사이에 위치해 있다. 우리 집에서는 동대문구 동사무소는 도보로 8분 거리다. 그런데 동대문구 동사무소로 가면 직원이 나는 성북구 동사무소로 가야 한다고 해서 버스를 타고 동사무소를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지하철역은 1호선과 6호선이 있는데 거리적으로 1호선이 좀 더 가까워서 1호선을 더 많이 이용한다.


우리 동네 지하철 역은 무슨 시골에 위치한 쓰러져가는 역 같이 생겼다. 작년에 국회의원이 지하철역 노후화를 개선하고 에스컬레이터도 설치를 해주겠다고 했는데 언제 설치가 되려나 모르겠다. 공항버스 타는 곳도 없어서 버스나 택시를 타고 공항버스 타러 15분을 가야 한다. 1호선이다 보니 역사 안에서 손 안 대고 코푸는 어르신들도 많고, 지하철 오는 시간도 마음대로라서 친구와 약속을 잡으면 30분 걸리더라도 1시간은 잡고 미리 집에서 나선다. 새벽에 1호선을 타면 노량진으로 향하는 수험생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공시생들인지 두꺼운 책을 백팩에 한가득 메고 다니는 모습이 내 또래인데도 안쓰럽게 느껴진다. 부족한 잠을 더 자려고 눈을 감은 사람부터, 시간을 쪼개서 공부한다고 지하철 의자에 앉아서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한다고 책 모서리로 내 허벅지를 쿡쿡 찌르는 사람까지... 게다가 너무 공부만 했는지 정신줄을 놓은 것 같이 지하철 안을 휘젓고 다니면서 혼잣말하는 사람을 꼭 한 번씩은 본다.


처음 이사를 와서는 재개발구역을 겁도 없이 들어가 봤다. 재개발구역 초입엔 각양각색의 꽃 이름을 가진 창문 하나 없는 술집이 있고 언덕 너머로는 수많은 빌라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길거리에 넘쳐나는 쓰레기와 진입금지를 표시한 노란 줄을 보며 걷다 보면 교회가 나오고, 그 교회 안에서는 더듬거리며 치는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제발 사람이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하며 그 길을 벗어난다.


집 근처에 아직도 운동할 만한 곳이 없어서 예전 살던 곳에서 필라테스를 하고 운동삼아 집까지 걸어온다.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는 반지하와 건물 2층에 수많은 미싱 공장들이 있다. 무슨 점집도 이렇게 많은지 90년대로 시간이 정지된 공간에 나만 들어온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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