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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Apr 09. 2020

누군가 나를 야!라고 부를 때

경찰이 꿈이었던 B대리 이야기


야! 야! 너 빨리 와서 이거 포장해!
야! 이거 가져와!
야! 이거 빨리 접어!


내가 우리 회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B대리는 개만도 못하게 "야"로 불리고 있었다.


불편한 상황이 오면 나는 습관적으로 숨을 참는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상황이 힘이 들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답답한 마음을 느낀다. 어느새 내 얼굴은 불쾌함으로 달아오르고 굳어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코로나로 재택근무나 휴가 장려는 기대도 안 했다. 대신 사무실에는 에탄올 몇 통이 탕비실에 있고 마스크는 회사에서 간간이 제공이 되고 있다. 회의실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회의를 하고, 지방에 있는 공장 회의도 참석을 한다. 우리 회사는 건재하다. 역병으로부터 중국이 어느 정도 위기를 벗어나면서 수출을 못한 1월과 2월 물량이 이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야근과 주말까지 중국 수출 물량 작업을 하는 정신없는 C공장에 방문을 했을 때 나는 B대리를 만나러 생산팀에 갔다. 거기서 나는 차라리 보지 말고 듣지도 말았어야 할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


B대리는 3년 전 한 여직원이 퇴사하면서 대타로 나와 일을 하게 됐다. B대리는 C도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한다. 그 공장은 내가 입사한 후 1년 뒤에 C에 공장을 짓기로 회사에서 결정이 났다. 1년 차 소사원이었던 나는 다른 몇 직원들을 비롯해서 사장님과 함께 C 공장이 들어설 부지를 구경하러 갔다. 사장님은 C공장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고, 나에게 본인의 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다. 그 이후로도 매년 나는 사장님과 C공장에 갔고, 공장이 어느 정도 틀이 잡히게 되면서 사장님의 꿈은 더 단단해졌다. 5년 뒤 C공장은 완공이 됐다. C도에서 회사에 자금지원이 나왔고 C도지사는 공장 설립으로 인해 C지역 경제 활성화와 고용창출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C공장은 C에서 가장 월급을 많이 주는 회사로 소문이 났다. 누구나 입사를 원했다. 그런 만큼 장기근속자가 많아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퇴사자가 더 많았다. 서울의 한 사무실에 근무하면서도 나는 종종 C공장의 소식을 들었다. 퇴사를 하는 직원들은 퇴사 직전에 나에게 연락을 했고 그들이 얘기하는 퇴사의 이유도 알게 됐다.


C공장에 내려가면 그 주변 식당에서 공장 사람들과 회식을 했다. 밑에 직원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상사들만 회식 자리에 참석을 했다. 그 자리는 그다지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다들 술을 잔뜩 먹고 서로를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그들 나름의 고민과 근심을 가지고 나에게 각자 소주잔을 내밀었고, 내 발밑에 화초들은 나 대신 소주를 잔뜩 마시게 됐다. 고민거리를 털어놓지도 못하는 C공장의 사원과 대리급들은 끊임없이 밀물 썰물처럼 들어오고 나갔다. 안 그래도 사람 얼굴과 이름을 못 외우는데 직원들 이름을 외울만하면 퇴사하고, 새로운 이름을 다시 얼굴과 매칭 시켜서 외워야 하니 어느덧 내 책상 앞에는 C공장 직원들 이름이 포스트잇으로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와 같이 3년간 일을 했던 C공장의 여직원 역시 나가기 직전까지 마음고생을 했다. 그리고 B대리가 그 여직원으로부터 인수인계도 제대로 받지도 못한 채 업무를 넘겨받았다. 군인이 꿈이었던 여직원이 시원시원하게 일을 꽤나 잘했기에 나는 B대리와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몇 달 동안은 B대리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화로 교육을 시켜줘야 하는 상황이 답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B대리는 일을 하면서 의심쩍은 상황은 나에게 바로바로 질문을 했고, 본인이 챙겨야 할 일에 대해서 놓치는 부분이 없었다. 그리고 B대리는 뭔가 실수를 했다 싶으면 즉시 나에게 얘기를 해 줘서 일이 커지기 전에 내가 대응을 할 수 있었다. 한번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없었고, 본인 스스로가 업무 계획표를 짜서 오히려 내가 빠뜨린 일은 없는지 확인을 시켜줬다. B대리는 그의 상사나 나보다 100배 이상으로 더 뛰어난 직원이었다. 


B대리가 여기서 생산직 일만 하기에는 아까운 사람인데...


B대리는 생산직에 있기 전에 다른 회사 사무직 일을 2년 정도 하다가 C공장으로 이직을 했다. 전 직장이 업무가 힘들고 같이 일하던 사람에 치여서 그만뒀다고 한다. 어딜 가나 퇴사의 이유는 거의 비슷한 듯하다. 지금 B대리는 내가 하는 일을 해 보는 것이 꿈이라는 감사한 얘기를 했다. 영어가 쥐약이라서 퇴근 후 틈틈이 공부를 한다는 B대리에게 나는 막상 닥치고 먹고살려면 영어든 뭐든 다 하게 되니 자신감을 가지라고 했다.


B대리와 일을 3년째 하고 있지만 나는 B대리의 얼굴을 안타깝게도 기억하지 못한다. C공장에 내려가더라도 B대리와 얼굴을 볼 시간이 없었다. 1년에 한 번 정도 B대리가 먼저 나에게 와서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입니다"라고 얘기를 해주면 나는 목소리를 듣고 B대리인 줄 안다. 사람 얼굴 익히는 게 왜 이리 어려운지 카톡 대문사진에 얼굴 사진 좀 올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저음의 목소리에 "~습니다. ~하겠습니다"로 대답하는 B대리는 발성도 좋아서 아나운서 했어도 잘 어울렸을 것 같다. 책임감 있는 태도와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과 끊임없는 야근에도 긍정성을 잃지 않는 모습에 소방관이나 경찰도 잘 어울렸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어김없이 상사에게 화풀이를 당하는 걸 보게 된 나는 B대리의 기분도 풀어줄 겸 전공과 같은 개인사에 대해 물어봤다. 경찰행정을 전공한 B대리는 경찰을 준비하다가 크게 다쳐서 수술을 6번이나 한 후에 꿈을 포기했다고 한다. 군대를 못 가서 대신 경찰로 다녀왔다는 B대리의 말투 속에는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한 듯했다. 하지만 뒤이어 B대리는


저한테 맞지 않은 거라서 안된 거라고 생각해요


라며 호탕하게 웃고 넘겼다.


어떻게 하면 B대리가 덜 힘들 수 있게 근무할 수 있는지 C공장과 업무를 할 때 항상 생각을 한다. 업무를 하다가 상사나 팀에 의견 제시를 했다가 오히려 면박만 당하고 이제는 업무에서 배제가 된 B대리에게 나는 끊임없이 업무 상황을 전달해 준다. 사실 그게 내가 일하기도 편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갑작스럽게 중국에서 급한 샘플 요청이 와서 C공장에 연락을 했다. C공장에서 본사까지 퀵으로 전달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급히 인편으로 샘플을 받았다. L차장이 급히 나에게 들고 온 샘플 박스를 열어보니 샘플 박스 안에 당 떨어지면 먹으라는 B대리의 귀여운 메모와 함께 과자가 들어 있었다

세심한 B대리는 당 떨어지면 먹으라고 이것저것 과자를 챙겨서 샘플과 보내줬다. 타르트는 받자마자 먹어서 개수가 하나 줄었네


 B대리는 아나운서를 하든, 경찰을 하든 뭘 하든 그 분야에서 본인이 맡은 일을 잘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 같은 시국에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게 다행이라던 B대리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버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처한 상황 속에서 버티는 정신력과 긍정 에너지를 멀리 있는 나한테까지 전달해주는 B대리를 오늘도 나는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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