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지리 Aug 30. 2019

그만둔다는 애한테 무슨 말을 더해

출장에서 관계자와의 술자리가 끝나고, 상사에게 말했다.


"실장님, 저랑 한 잔만 더 하시겠습니까?"






당시, 난 전임자가 싸고 간 'Big Shit'을 치우느라 몇 달째 새벽잠을 자고 있었다.


골칫덩이였던 작년 사업의 결과보고서 작성을 교묘히 올해로 넘긴 전임자는 곧 인사이동으로 부서를 떠났고, 신입직원이자 비전공자인 내가 그의 일을 넘겨받았다. 본인만 알아볼 수 있 듯한 인수인계서와 대용량 압축파일 따라왔다. 나보다 당황스러운 건 담당 공무원이었나 보다. 골목대장 같은 그는 '이제 담당자가 되었으니 작년 보고서 빨리 작성해'라고 화를 내더니 항상 기분 나쁜 말투로 빈정거렸다. 매일 자정 넘어 까지 관련 공부와 보고서 작성을 하면서, 그의 말대로 '이제 담당자'로서의 의견을 내면 '이쪽 전공도 아니면서 어떻게 아냐'며 전임자에게 물어보라는 말만 돌아왔다. 그때마다 전임자는 쓸데없이 장황한 설명만 늘어놨고, 정작 중요하거나 본인이 잘못한 내용에 대해선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렇게 발언권 하나 없이 실장과 전임자, 담당 공무원의 꽁무니만 쫓아다니며 보고하고 수정하길 반복했다.


매일 아침, 사직서의 제출일을 '오늘 날짜'로 고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회사에서 누구나 겪는 일이고 이를 헤쳐나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다. 조금 더 가까운 친구들은 곧 결혼하는 데 퇴사는 힘들지 않겠냐거나 그냥 못하겠다고 드러누우라고 했다. 공공기관에 정직원으로 들어갔다며 그렇게 좋아하시던 부모님은 '그 새끼들 한 방 먹이고 때려치우라'며 나보다 더 화를 내셨다. 그러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건 신기한 일이다. 그리고 부모님보다 더 열심히 그들 욕을 하던 지금의 와이프 덕분에 간신히 마음을 다 잡고 생각했다.


'실장한테 지금 힘든 걸 말하고 상황을 바꿔보자. 그리고 딱 2년만 더 다녀보자.'






출장에서 관계자와의 술자리가 끝나고, 실장과 허름한 치킨집에 들어섰다. 텅 빈 테이블들 사이로 무료하게 TV를 보고 있는 주인 내외가 보였다.


"후라이드랑 후레쉬 하나 주세요."


실장은 치킨보다 먼저 나온 소주를 잔에 따르더니, 이제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팔짱을 끼며 몸을 의자 기댔다. 이미 걸치고 온 소주 몇 잔이 입 떼는 걸 도와주었다. 갑자기 담당하게 된 사업들의 버거움으로 시작해 발언권 없이 벌써 몇 개월 째 상급자들 사이에 끼여 하루하루 난감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은 결혼 준비도 하고 있고, 어쨌든, 약간의 업무 조정 필요하다고 말했다.


짐짓 듣고만 있던 실장이 입을 뗐다. 전임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오픈하지 않는 걸 무기로 삼 즐고, 담당 주무관은 원래 그 모양인데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난감한 것은 알겠지만 조금 더 해보라고. 업무조정 없이 이대로 쭉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곤 결혼 쪽으로 말을 돌렸다.


앞 접시에 치킨 한 조각은 그대로였고, 빈 소주병만 늘어갔다.






결혼에 대한 조언이 끝난 듯하여,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나는 실원 간 업무 강도의 불균형과 그 불만들에 대해서 아는지 물었다. 실장은 알고 있지만 능력에 맞게 준거라고 했다. 그러면 업무 강도가 높은 직원이 갑자기 인사이동이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건 그때 되면 다 알아서 된다고 했다. 나는 하나만 더 물어보기로 했다. 내가 그만둔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말에, 실장은 그것도 자기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에게 무슨 대답을 바랐을까. 그의 덤덤한 말투와 별 일도 아닌데 분위기 잡는다는 듯한 표정이 되려 날 조직 밖으로 더 밀어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치킨집을 나와 모텔방으로 돌아갔다.






가만히 누워 생각했다.


듣도 보도 못했던 기관에 미끄러지듯 들어와, 일 년 넘게 이방인으로 살았다. 채용도 확정되지 않은 인턴에게 출신 대학을 묻고, 회식 때마다 약속이나 한 듯 아래 직원들이 술잔을 돌리고, 이해할 수 없는 자기소개를 시키며 킥킥 웃어 대고, 전 직원회의에서 성희롱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자기들 입맛에 맞게 일 년에도 몇 번씩 인사이동을 시키는 이 기관의 '사내 문화'. 당장 1~2년을 버틸 이유도 없어 보였다.


다음 날 아침, 매일 고치던 사직서의 제출 일을 정했다.






얼마 후 실장에게 퇴사 의사를 전했다. 업무분장을 새로 해주겠다는 실장의 뒤늦은 제안에, 후임자를 정해주면 인수인계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작년 사업 결과보고서 작성은 마무리했지만 여전히 골칫덩이인 사업들을 몽땅 받게 된 책임이 열이 잔뜩 받아서 말했다.

"노력은 해 봤냐? 그래 뭐, 그만둔다는 애한테 무슨 말을 더해."


무슨 말을 더하냐면서 혼자 10분 가까이 떠드는 그의 입술을 보는 내내 생각했다.


'일단, 신혼여행 첫날엔 맥주 한 잔 딱! 하고 푹~ 자고 일어나서, 다음 날 바닷가로 가서 생선구이를 먹고! 그다음엔~'





인턴과 정직원을 합쳐 총 3 곳의 공공기관에서 총 3 년을 근무한 짧은 경험으로는, 모든 공공기관이 이해할 수 없는 '사내 문화'를 가졌거나 보수적이지는 않다. 주무부처의 성향이나 영향을 받는 정도에 따라서도 다르고 관련 산업분야 역시 분위기를 좌우하며, 기관장이 누구냐에 따라 꼰대들의 '나댐' 정도도 달라진다.

<공공기관 때려치우기> 매거진의 이야기는 이렇게 다섯 편으로 마무리 짓지만, 공기업과 공공기관의 차이부터 나름의 TIP을 공유하는 글도 나중에 올릴 예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웨덴 출장 가기 싫다니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