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52
경자, 말자, 명자, 미자, 숙자, 순자, 연자, 영자, 옥자, 정자, 추자, 춘자, 향자, 혜자, 화자 같이 子(자)가 쓰인 한국 여자 이름들이다. 이런 경향은 특히 1940~1960년대에 태어난 여자들의 이름에서 두드러진다. (조선시대까지 평민들은 애초에 이름다운 이름을 가지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름에도 시대의 유행이 있어서 요즘에는 딸의 이름에 子를 쓰는 게 조금은 촌스럽게 들린다. 어쨌든 한국에서 한자 子의 대표 뜻이 '아들'이고 그렇게 외워서 알고 있다 보니, 여자 이름에 쓰인 子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떠돌던 말이 있다. 딸을 얻은 부모들이 다음에는 아들을 낳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딸의 이름에 '아들'의 뜻이 담신 子를 썼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반박했다시피 이는 나도 일본식 여자 이름에 영향을 받은 게 맞다고 본다. 菜々子[나나코], 律子[리츠코], 吉子[요시코], 雪子[유키코], 久美子[쿠미코], 春子[하루코]처럼 일본 여자 이름에서는 子[코]를 쉽게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에서 '○자(○子)'식의 여자 이름이 생겨난 건 일제강점기 말 무렵이다. 이 시기에 일본 제국은 우리 국민들에게 일본식 성씨를 쓰게 하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이름이 없던 (한글 이름은 있어도 한자는 없던) 여자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 주려다 보니 일본식으로 '□子'를 사용하게 됐고, 그것을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으니 '○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여전히, 일본에서도 남아선호사상이 강했기에 아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子를 썼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추측인 것 같은 게 일본에서는 9세기경부터 당나라의 풍습을 모방하여 왕가의 적출 여자에게 子로 끝나는 이름을 붙여왔다. (물론 그 당시에 아들을 원하는 마음으로 썼을 수도 있다.) 일본 황실에서는 여전히 이를 지키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왕비와 부인 이름은 모두 子[코]로 끝난다. ('일본 황실'을 검색해서 구성원의 이름을 찾아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문화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에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민간에도 급속히 퍼져나갔고, 그래서 일본 여자 이름에서 글자 子가 흔하게 쓰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子를 '아들'로 쓰지 않는 것 같다. 아무리 한자를 다르게 사용하는 문화 차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여자 이름에 '아들'이 들어있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다행히도 이 의문은 일본어사전에서 子를 찾아보고 나서 바로 풀리게 되었다.
㉠ こ(子)
① 자식(子息); 또, 그에 준하는 것((양자·새끼·알 따위)).
② 아이; 소녀
③ 이자(利子).
④ 갈라져 나온 것.
⑤ 여자 이름을 구성하는 말.
⑥ (복합명사의 끝 부분의 요소로서) 사람·사물의 뜻을[상태를] 나타내는 말
㉡ 子
① 자식; 자녀; 아이.
② 남자의 높임말.
③ 사람
④ 동물의 알 또는 식물의 열매.
⑤ 작은 것.
⑥ 물건 이름 밑에 붙이는 말.
⑦ 작위의 넷째.
⑧ 자; 지지(地支)의 첫째; 쥐.
㉠은 한자 子의 훈독(訓讀)으로 쓰는 こ[코]의 뜻풀이다. 여섯 가지 뜻 중에서 제 일번이 '자식'이다. 자식은 아들딸의 성별이 특정되지 않는다. 그외에 '아이, 소녀, 여자 이름'이 눈에 띄는데 '아들'은 없다. ㉡의 子는 음독(音読)을 해서 し[시] 또는 す[스]로 읽어야 한다. 여기에서도 첫 번째 뜻은 예시로 나와 있는 子息[しそく](자식)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식, 자녀, 아이'다. 그외 일곱 가지 뜻의 예시로 각각 君子(군자), 男子(남자), 卵子(난자), 瞳子(동자), 帽子(모자), 子爵(자작), 甲子(갑자)를 들 수 있다. 어디에도, '아들'은 없다. 결국 사전을 찾아본 바, 일본어에서 子의 대표 뜻은 사람을 기준으로 어른이 되기 전의 '아기, 아이',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이다. 그러고 보니 일본 영화 <우연과 상상(偶然と想像)>에 나온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이름 夏子[나츠코]의 한자를 풀이하며 '여름의 아이'라고 소개하는 게 기억났다. 또 일본 애니메이션인 <天気の子>가 우리나라에서 <날씨의 아이>로 번역되어 개봉된 것도 생각났다.
같은 한자인데 왜 한국에는 있는 아들이 일본에는 없는 걸까? 의문이 들자 자연스레, 너무 당연히, 한자의 원조인 중국에서는 子가 어떻게 쓰이는지 궁금해졌다. 중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사람, 직업, 스승, 씨, 알, 종자, 어린 것, 작은, ...' 등등 전반적으로 한국어, 일본어와 비슷했지만 단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 子[ zǐ ]
① 아들. 사내아이. [고대에는 자식을 가리켰지만 현대에는 아들만을 가리킴]
중국어도 마찬가지로 맨 첫째 줄에 써 있는 대표 뜻은 '아들, 사내아이'였다. 결국 한국어에서 子의 대표 뜻을 '아들'로 풀이하는 것은 한자의 원조인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부연 설명도 있었다. 한국어 사전에는 없던 '고대(古代)에는 자식을 가리켰지만 현대에는 아들만을 가리킴'이 그것이다. 아하!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주 먼 옛날에는 子가 아들딸을 구분하지 않는 '아기, 아이, 자식'을 뜻하는 글자였는데 시간이 지난 어느 시점에 중국과 한국에서는 '아들'만을 뜻하는 글자로도 사용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는 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중일 삼국에서 동시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건 일본 황실 여자들의 이름에 子를 쓰게 됐기 때문은 아닐지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 글에서 그 정도까지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다시 고개를 드는 질문, 정말로 고대에는 子가 아들만 뜻하지 않았을까? 이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하다가 기원전 9~7세기에서 썼다는 중국 최초의 시가집 <시경(詩經)>을 빌려보게 되었다. (살다살다 이런 책을 보게 될 줄이야!)
*
桃之夭夭 복숭아나무 싱싱한 가지
其葉蓁蓁 복사꽃 활짝 피다
之子于歸 시집가는 저 아가씨
宜其家人 온 집안 화락케 하다
- 桃夭(도요: 복숭아나무) 중에서
*
維鵲有巢 까치둥지에
維鳩方之 뻐꾸기 들어가 사니
之子于歸 아가씨 시집갈 때
百兩將之 백대의 수레가 맞이하지
- 鵲巢(작소: 까치집) 중에서
*
鳲鳩在桑 뻐꾸기 뽕나무에 앉아 있네
其子七兮 그 새끼는 일곱 마리
- 鳲鳩(시구: 뻐꾸기) 중에서
도요(桃夭)와 작소(鵲巢)에 나오는 之子于歸(지자우귀)를 보자. 歸(귀)는 '돌아가다'가 대표 뜻이지만 '시집가다'는 뜻도 있어서 주어가 여자가 되어야 한다. 당시에는 이른 바 이팔청춘(二八靑春)이라고 할 수 있는 10대 초중반의 나이에 혼인을 했는데 결혼을 하기 전에는 아이,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되었다. ('어른'의 어원인 '어르다'에 '안다'는 뜻이 있고 이것이 확장되어 남녀간의 성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 막 시집을 가는 '여자 아이'를 가리키는 데 분명히 子가 쓰이고 있다. 게다가 시구(鳲鳩)를 보면 사람뿐 아니라 동물인 뻐꾸기 새끼에도 子를 쓰고 있다. (동물의 새끼, 식물의 씨의 뜻이 있다는 걸 이미 확인했다.) 사전에 써 있는 그대로 먼 옛날에는 子가 '아들'의 뜻으로 쓴 글자가 아니었다는 게 확인이 되었다.
** 참고 **
책. 시경 :세계 최고의 노래 모음집. 공자, 모형, 모장 지음 / 인간사랑
중앙일보.<한자여행>歸順-투항하여 복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