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과 일과 절, 그리고 데이 (1)

한국인의 국어생활 31

by 집우주

한해를 마무리하며 달력을 돌아보다가 문득 한국어를 가르치던 때의 에피소드가 하나 생각나서 이번 주제를 쓰게 되었다. 미국인으로 기억하는 한 학생이 자기 나라의 기념일을 한국어로 뭐라고 하는지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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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 Year's Day - 설날 (*음력)

* Independence Day - 독립기념일

* Thanksgiving Day - 추수감사절


다행히도 내가 아는 단어들이라서 바로 설명해 줬다. 언뜻 어렵게 보이는 설, 독립, 기념, 추수, 감사는 오히려 사전의 기본 뜻만으로도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다. 문제는 day에 있다. 영어에서 한 단어가 한국어에서는 날, 일, 절 세 글자로 쓰이니 학생 입장에서 왜 그런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할 수 있다. 만약 이때 선생이 이들 사이의 차이를 모르고 있다면 멘붕이 온다.


* 날 ; 설날, 한글날, 어린이날, 스승의날, 부처님 오신 날, ...

* 일 ; 식목일, 현충일, 6·25전쟁일,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

* 절 ;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 노동절, 성탄절, 만우절, ...


사전에서 찾으면, 날은 '지구가 한 번 자전하는 동안을 세는 단위', 일(日)은 '날을 세는 단위'로 나온다. 굳이 이 둘의 뜻을 따지려고 힘쓰고 애쓰지 말자. 날과 일은 같고, 고유어냐 한자어냐의 차이일 뿐이다. 날 앞에는 보통 순우리말이 놓이고, 일은 한자어 뒤에 붙는다. '스승의', '부처님 오신'처럼 수식의 형태가 날에만 쓰이는 것도 고유어이기에 가능한 문법일 뿐 둘의 경중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절(節)은 특별하다. 절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의 국경일인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에만 쓰인다. (2006년에 한글날도 국경일에 추가되었다.) 사실 절은 날이나 일처럼 24시간의 하루를 가리키는 절대적 시간을 뜻하는 글자는 아니다. 옛날 중국 황제의 생일을 일컫던 천추절(千秋節), 만수절(萬壽節)에서 보듯 절은 '최고의 기념일, 축제일'의 의미로 쓰였다. 그러니 절은 날이나 일보다 격(格)이나 급(及)이 높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5개 국경일의 균형을 맞춰 '한글절(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계에서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勞動節)'로 부르자고 주장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훨씬 더 익숙한 '성탄절(聖誕節)'의 행정상 공식 명칭은 '기독탄신일(基督誕辰日)'이다. '부처님 오신 날'은 예전에는 '석탄절(釋誕節)'이었다. (한자로 쓴 석가탄신(釋迦誕辰)의 준말인데 광물인 석탄(石炭)으로 오해할 수 있고 어감도 좋지 않다.) 기독교의 '부활절(復活節), 사순절(四旬節), 오순절(五旬節)'과 불교의 '출가절(出家節), 성도절(成道節), 열반절(涅槃節)'에는 위대한 분의 일생을 기리려는 종교인들의 존경이 담겨 있다. 의아한 것은 만우절(萬愚節)이다. 거짓말을 마음껏 하고 그것에 속아 바보가 되는 날인 April Fool's Day가 어떻게 예우를 받게 된 것인지 이리저리 찾아보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모르겠다. 아무튼 '만우일(萬愚日)'이나 '바보의 날'이 언어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영 어색한 면이 있으니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자.


이처럼 한국어에서 날, 일, 절이 어떻게 쓰이는지 살펴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나라와 같이 한자를 사용하는 나라들도 일과 절 두 글자를 다르게 쓸까? 이웃나라들의 기념일에서 한국의 국경일과 국가기념일에 해당하는 날을 검색해 봤다.


{중국}

- 전 공민의 절일(节日)

新年(신년), 春节(춘절), 清明节(청명절), 劳动节(노동절), 端午节(단오절), 中秋节(중추절),

国庆节(국경절)

- 일부 공민의 절일(节日)

妇女节(부녀절), 青年节(청년절), 儿童节(아동절), 人民解放军建军纪念日(인민해방군건군기념일)

- 기타

27주년 기념일, 5.30 기념일, 7.7 항전기념일, 9.3 항전승리기념일, 9.18 기념일,

教师节(교사절), 护士节(호사절), 记者节(기자절), 植树节(식수절)


{일본}

- 국민 축일(国民の祝日)

元日(새해), 成人の日(성인의 날), 建国記念の日(건국기념일), 天皇誕生日(천황탄생일),

春分の日(춘분의 날), 昭和の日(쇼와의 날), 憲法記念日(헌법기념일), みどりの日(녹색의 날),

こどもの日(어린이 날), 海の日(바다의 날), 山の日(산의 날), 敬老の日(경로의 날),

秋分の日(추분의 날), 体育の日(체육의 날), 文化の日(문화의 날), 勤労感謝の日(근로 감사의 날)


{대만}

- 기념일(紀念日): 전국 국기 게양

中華民國開國紀念日(중화민국개국기념일), 和平紀念日(화평기념일), 反侵略日(반침략일),

革命先烈紀念日(혁명선열기념일), 佛陀誕辰紀念日(부처탄신기념일), 解嚴紀念日(해엄기념일),

孔子誕辰紀念日(공자탄신기념일), 國慶日(국경일), 臺灣聯合國日(대만연합국일),

國父誕辰紀念日(국부탄신기념일), 行憲紀念日(헌정기념일), 國父逝世紀念日(국부서세기념일)

- 절일(節日): 각 기관, 단체, 학교 등에서 개별적으로 축하

道教節(도교절), 婦女節(부녀절), 青年節(청년절), 兒童節(아동절), 勞動節(노동절),

軍人節(군일절), 教師節(교사절), 臺灣光復節(대만광복절), 中華文化復興節(중화문화부흥절)


먼저 중국을 보면, 대부분 절일이 节(=節 절)로 끝난다. 그중에서 춘절을 제외한 모든 단어가 3음절로 이루어졌다. 日(일)은 오직 '기념일(纪念日)'인 경우에만 쓰였고, 다른 형태는 없다. 반면 일본의 축일에는 일(日)만 보인다. 한국은 춘분(春分)이라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春分の日'이라고 한다. 메이지(明治 1873-1911)시대에는 節(절)도 썼다고 한다. 일본의 입장에서 천황이 탄생한 날이 천장절(天長節)이었는데 이후에 명치절(明治節/메이지절)로 불렸고, 1945년 패망 후 문화의 날(文化の日)로 바뀌었다. 최근 일부 세력들이 이를 다시 '메이지의 날(明治の日)'로 바꾸자고 하고 있는데 일본은 더 이상 기념일 명칭에 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만의 경우는 일과 절 두 글자의 위상이 우리나라와 반대인 것 같다. 전국에 국기를 게양하는 기념일에는 일(日)이, 개별적으로 축하하는 절일에 절(節)이 쓰였다.


마지막으로 우리와 가장 비슷하면서 하나도 닮지 않은 북한과 비교해 보자.


{한국} - {북한}

* 세계 여성의 날 - 국제부녀절

* 식목일 - 식수절

* 광복절 - 조국해방의 날

* 유엔군 참전의 날 - 전승절(조국 해방전쟁 승리기념일)


한글이라는 같은 글자를 사용하는 두 나라지만 같은 것을 기념하는 날의 이름은 완전히 다르다. 세계 여성과 국제부녀, 식목과 식수, 광복과 해방에서 단어와 관점에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날, 일, 절도 어긋나 있다. 북한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난날(생일의 북한어)을 각각 태양절(太陽節)과 광명성절(光明星節)로 부른다. 최고지도자의 기념일에 쓰는 것을 보면 절(節)은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격이나 급이 높은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유엔군 참전의 날'인 7.27 정전협정체결일을 북한에서는 '조국 해방전쟁 승리의 날'로 선전하다가 1996년 '전승절(戰勝節)'이라는 국가 명절로 격상했다. 1949년 남한의 국경일 제정 당시에 '광복절(光復節)'과 함께 '독립기념일(獨立紀念日)', '해방절(解放節)'도 후보에 있었다. 이때, 국경일 명칭의 3음절 통일에 의해 독립기념일이 탈락했고, 해방절은 북한이 사용해서 제외되었다. 북한에서는 현재 8.15를 '조국해방의 날'로 부르고 있으니 언젠가 '절'이 '날'로 격하된 것 같다.


이렇게 한국과 북한에서 절은 분명 예우를 받는 글자다. 하지만 나는 절이 앉는 자리가 언제나 상석은 아니라고 본다. 과연 북한의 국제부녀절(國際婦女節: UN에서 3월 8일로 정한 International Women's Day다.)이 최고지도자를 기념하는 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면 좀처럼 수긍하기 어렵다. (물론 나는 북한에서 이 날을 얼마나 성대하게 기념하는지는 모르니 근거없는 말이긴 하다.) 내 추측으로는 아마 중국의 부녀절(妇女节) 명칭을 그대로 가져왔을 것이다. (중국은 1924년부터 부녀절을 기념했다.) 1947년 북한은 식수절(植樹節)을 지정했는데 이 역시 중국 식수절(植树节)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2년 뒤인 1949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식목일(植木日)을 정했는데 이를 두고 왜 한국은 나무를 심는 날을 북한보다 낮게 다루느냐고 따질 수 있을까?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념해야 할 것은 나무를 심으며 자연을 가꾸어나가는 일이지, 그 날이 일이냐 절이냐가 아니다.


단오(端午)는 단옷날, 단오일, 단오절이 모두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한자인데도 날이 붙고, 일과 절 모두 사용이 가능하고 그에 따라 차별하지도 않는다. 만우'절'이라고 해서 한국인이 하는 거짓말의 격이 올라가고 장난의 차원이 높다고 할 수 없다. 만우에 절이 붙은 데에는 글자 하나의 문제가 아닌 언어, 역사, 정치, 문화, 사회 등의 요인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한글'날'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한글을 얕잡아 보거나 한글의 우수함을 몰라보지 않는다. 나에게는 순우리말끼리 어울리는 가갸날, 한글날이 더 좋게 들린다.



** 참고 **

법제처. 지식창고. 광복 독립 그리고 해방

https://www.moleg.go.kr/mpbleg/mpblegInfo.mo?mid=a10402020000&mpb_leg_pst_seq=13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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