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범진 Jan 27. 2022

저마다 자기만의 공간을 기억하는 법

돈까스 먹다가 만난 동네 #1

용산이라는 동네는 나한테 너무 크다. 여기가 용산이야? 저기도 용산이라고? 다른 사람들은 힙한 곳만 골라서 잘 다니던데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다음 행선지를 모르겠단 말이다. 갑자기 높은 빌딩 숲을 지나가다가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언덕길을 오르다, 아는 골목길이 나오면 내가 여기를 왔었던가.. 하면서 매번 새롭게만 다가온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만 왔다 갔다 하니 용산이라는 동네가 몇 번을 와도 낯설게만 느껴진다. 오늘은 돈가스 집을 찾으러 가다 용산역에 내렸는데 역이 이렇게 큰지 여태 몰랐다.


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 버스 타고 노을 지는 한강뷰를 한참 보다 어느 정류장에 내리면 서울에 아직 이런 아파트가 있나 싶은 곳이 있다. 지어진지는 50년이 넘은 아파트지만 곳곳에 아직 사람들의 온기가 남아있다. 정말 눈으로 봐도 정말 오래된 곳. 당시 중산층을 대상으로 분양하는 시범아파트로 만들어졌다한다. 왜 아직도 이런 곳이 있을까 싶어 옛날 기록들을 찾아보니 재개발 관련하여 이해관계자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듯.

중산시범아파트 전경

갑자기 아파트 얘기는 왜 하냐고? 그 옆에 있는 조그만 기사식당에서는 돈가스를 팔고 있다. 고바우 식당 , 작년에 한창 돈가스 노포를 찾으러 다닐 때 저장해뒀던 곳이다. 돈가스 집을 찾을 땐 네이버 지도를 켜고 돈가스 키워드만 입력한 채 계속 로드뷰를 돌려보는데 그러다 우연히 찾은 곳 중 하나다.


고바우 기사식당

조금 일찍 퇴근을 한터라, 이제야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5시쯤이었다. 가게 안에는 기사님 몇 분이 계셨고, 아주머니는 잠깐 쉬는 시간이신 듯, 종이신문을 보시며 수다를 떨고 계셨다.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만 대체로 내부는 깔끔한 편이다.

고바우 식당 내부

돈가스 전문이라는 노란 메뉴판이 가장 눈에 띈다. 육개장, 제육볶음 같은 간편하고 빠르게 나올 수 있는 메뉴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격은 최근에 조금 올라 7~8천 원 정도. 돈가스를 주문하면 아주머니께서 수프와 반찬 그릇을 주시고, 앞에 있는 스테인리스 반찬통에서 먹을 만큼만 덜어내면 된다. 반찬은 김치, 치커리, 멸치, 콩나물, 물김치가 있고, 매번 바뀌는 건지는 모르겠다. 수프는 특별한 거 없이 그냥 흔한 수프 맛ㅎ

식전 스프

돈가스가 나왔다. 생각보다 양이 작긴 하다. 그래도 밥이랑 반찬 곁들어 1인분으로 먹기에는 나쁘지 않은 듯. 소스는 어떤 걸 베이스로 만든 건지 모르겠는데 굉장히 밝고, 달달한 맛이 많이 난다. 무심하게 뿌려놓은 케요네즈가 더해져 약간 뻔하지만 익숙한 맛이라 좋았다. 얇은 튀김옷에 소스가 그득하게 스며들어있고, 입에서 쫙쫙 달라붙는다. 고기는 얇지만 적당하게 씹히는 편. 반찬 맛도 좋아 돈가스 먹으면서도 골고루 먹게 된다.

돈까스 (7500원)

기사식당은 어딜 가도 정겨워서 좋다. 오랜만에 온 단골손님과 안부를 주고받거나, 조용하게 신문 넘어가는 소리, 식사를 마치고 자판기에서 커피 뽑아먹는 소리 등등 식사하는 동안 잔잔하면서 일상 속의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누구는 이런 돈가스가 촌스럽고 올드하다   있겠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든든한  끼를 해결해주는 돈가스고, 서울에 이런 곳도 있구나 하고 기억해 주면 좋겠다.


 여담이지만 최근 서울에 오래된 아파트 중에 하나였던 반포아파트가 재개발에 들어갔는데, 인스타에 자발적으로 자기가 살았던 아파트 추억을 공유하는 계정들이 하나둘씩 생겼다. (요즘 재밌게 보고 있는 계정이다 @apt_banpo) 아파트에 살았던 주민이라면 한 번쯤 추억이 있는 음식점, 서점, 공간들을 제보하고 다 같이 공유한다. 서로의 기억을 나누며 공감하는 콘텐츠는 내가 거기에 살지 않았음에도 마음 훈훈해지게 한다.


요즘 재밌게 보고 있는 계정 (@apt_banpo)


오늘 다녀온 이 동네도 재개발에 들어간다 했을 때 그런 자발적인 활동(?)들이 일어날지는 모르겠다. 그렇지 않더라도 먼 훗날 누군가 이 게시물을 보며 아 거기에 그 기사식당 기억나! 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거라도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돈까스 찾아 삼만리

이 세상 돈까스가 없어지는 그날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