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롭게 살기 위해 집을 짓습니다.
50여 가지의 다육이로 꾸며놓은 부동산 사무실에서 처음 집주인 노부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내 옆 의자에 앉았고, 할머니는 할아버지 곁에 서서 매매 계약서를 넘겨본다. 새파랗게 젊은 부부가 시골에 헌 집을 구입한다 하니 중매인도 노부부도 같이 온 변호사도 이런 광경이 낯설어 궁금한 게 많은 표정으로 우릴 보고 있다.
쭈글한 손과 주름 하나 없는 손이 계약서를 두고 이리저리 오가는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는 해는 이제 막 떠오르는 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인데 도장 찍고 서명하고 변호사의 절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해서 말을 삼키는 듯했다. 모든 절차가 끝난 후에야 할아버지는 입을 뗐다.
“내 여기서 태어났고 자랐고 자식새끼들 다 건강하게 살아있다오. 이 집에서 무탈하게 지내다 갑니더. 당신들 아주 좋은집에 들어간거요. 언제 한 번 집 다지어지면 내 놀러갈테니 차나 한잔 주이소.”
아쉬울 것이다. 당신의 모든 인생이 그 터에서 시작되고 끝이 났으니. 쭈글한 손이 먼저 악수를 청하며 다음 만남을 약속했다.
우린 계약이 끝난 후 노부부의 모습을 간직한 채 다시 그 터로 향했다. 주변 건물이 없어 한 여름에도 바람이 강하다. 노부부의 집은 담벼락조차 없어 강한 바람을 견디고 서있다. 마치 쭈글하고 건조한 노부부의 손과 같이 집도 많이 헤지고 텄다. 이때의 감정을 잊고 싶지 않아서 새로 지을 집에 이 감정을 녹여두고 싶다.
이야깃거리가 있는 집을 짓자. 이 집에서 함께 할 사람과 끊이지 않는 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도 친절하고 묵직한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자.
내면의 이야기가 나오는, 따뜻한 차가 어울리는, 음악에 자연의 소리가 함께 들리는, 어느 곳이든 머물 수 있는 그런 집.
주방과 다이닝 테이블, 거실은 한 길로 시선이 이어진다. 식사를 준비하는 이도 대화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설계했다. 모든 대화에 항상 끼고 싶은 나에겐 중요하다. 그래서 식사나 다과를 준비할 때에도 함께 하는 이와 꾸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소통의 온기를 이어간다.
아무 생각 없이 밖을 바라보며 따뜻한 물에 손을 씻고 싶어 세면대를 창 넓은 복도에 배치했다. 복도의 폭은 넓어 2층으로 올라가는 첫 계단을 벤치로 만들고, 서재 겸 휴식공간을 창가에 두었다.
짧은 복도는 로리(반려동물)와 소통하는 공간이다. 손 씻을 때 마다 로리가 마주 보고 엉덩이까지 흔들며 웃고 있을테니 그럼 나도 같이 옅은 미소를 지닌다. 따뜻한 손은 창문을 열고 맨발로 나가 로리의 머리 위를 쓰담는다. 햇볕은 로리 등에 비추어 털들이 다시 빛을 뿜는다. 가느다란 금테를 두른 듯 로리는 반짝거릴 것이다.
‘로리야, 여긴 안과 밖이 구분 없는 곳이야. 우린 언제든지 너를 보며 함께하고 있어.’
세차게 바람이 불고 비 오는 날이면 안절부절하며 한자리를 빙빙 도는 로리를 위해서 짧은 복도와 세면대도 중요하다.
안방은 따로 없다. 방마다 용도마다 구분 지을 필요가 뭐가 있나 싶어서다. 경계 없이 다니다 앉고 싶은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있게 곳곳에 책을 놔둔다. 마음에 드는 한두 문장을 골라 메모한 뒤표지에 붙여두고 그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책은 도끼다’라는 말처럼 책은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경험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고 삶의 총체적 과정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당신은 왜 이 문장이 마음에 들어 이 책을 집어들었는지, 나와 다른 어떤 경험을 비추어 해석했는지 궁금하다.
‘어울림’, 환경과 사람 그리고 물건과 주위와의 관계이다. 그런 관계성을 개성 있게 풀어나가고 싶었고 운 좋게 우리의 관계성을 공간으로 풀어줄 건축사를 만나 ‘생각의 연쇄를 주제로 인생 과업 프로젝트(단독주택 짓기)’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상당 시간 동안 스스로에게 질문했고, 많은 책을 통해 방향을 잡았다. 관계는 더욱 두터워졌고 믿음이 확신이 되어 실현되고자 하는 이 시기에 ‘본질’을 다시금 되새김 하기 위해 타자기를 두드린다.
내년 5월, 많은 게 변하겠지만 변하지 않는 단 하나를 위해 올겨울 웅크린 채 준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