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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썬 Oct 19. 2022

어느 모범생의 눈물겨운 자기 고백

인생에 정답은 없다, 나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만 존재할 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모범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던 초등학교 5학년까지 치뤘던 대부분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반 1등을 도맡아 하곤 했다. 이후 아빠의 일을 따라 해외에서 살게 되면서 새로운 환경과 언어에 적응하기 위해 정신없던 시기가 잠시 있었지만 내 안의 모범생 DNA는 마치 찰거머리처럼 붙어있는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학구열이 한국 못지않다는 국제학교를 다니면서 열심히 내신 관리를 했고 두 달 간의 여름 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아와서는 마치 대치동이 내 고향이라도 되는 듯 주 5일씩 하루 종일 머물며 무려 몇 년간의 방학과 몇 년 간의 돈을 기부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때 나의 최종 목표였던 대학 진학을 위해서였다.


이런 노력을 알아주었는지 결국 나는 1순위로 지망했던 대학과 학과에 무사히 안착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어 축제도 열심히 다니고 동아리도 하고 술도 열심히 마시러 다니면서 청춘을 즐겼다. 하지만 그놈의 모범생 DNA는 나를 편히 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내 안에 자리 잡은 1학년 교내 활동 → 2학년 대외활동 → 3학년 학회 → 4학년 인턴이라는 ‘공식’에 따라 내 시간을 투자해가며 열정적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그 결과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이라고 불리는 회사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답의 열심히 걸어 드디어 다다른 최종 목적지인만큼, 나는 취업을 하고 일을 하다 보면 그냥 자연스럽게 커리어는 이어지는 줄 알았다. 내 직무에 대한 후회나 걱정 없이 좋은 회사에서 일하면서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적당한 때 원하는 회사를 골라 이직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곤 했다. 마치 고등학생이 대학만 가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오해하는 것처럼, 사회초년생의 나는 그 똑같은 오해를 다시 반복한 것이다. 취준생 때의 나는 몰랐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직무가 실제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재미있지 않으며 단순히 회사를 다니는 것만으로는 결코 커리어가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사와 동시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사회생활과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큰 압박이라는 것을. 오히려 일을 하면 할수록 이 일이 나에게 맞는 일인가, 이 회사는 나에게 맞는 것인가, 어떻게 이렇게 계속 회사를 다니고 하루 꼬박 8시간을 한 곳에 앉아 일만 하면서 지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는 것을.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이런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모범생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남들처럼 살기 위해, 사회에서 옳다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 스스로를 탐구하는 대신에 ‘정답’의 길을 마치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생의 속도 또한 내가 주체적으로 컨트롤하는 대신 세상이 세팅해놓은 속도대로 움직였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서 기계적으로 조립되는 부품들처럼. 그렇게 세상의 그 많은 회사원, 세상의 그 많은 모범생 중 1인이 되어버렸다.


이제야 깨닫고 있다. 인생에 단 하나의 정답이란 것은 없다. 70억 인구가 있다면 70억 개의 정답이 있는 것이고 남들이 걸어온 길을 똑같이 걸어가 봤자 나는 그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성공한 사람의 삶을 무조건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가야 한다. 한번뿐인 짧은 인생, 언제까지 사회의 기준에 맞춰서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사회의 기준에 맞춰 나의 자아를 버린 채 일을 해야 되는 시간이 있다면 그 이후 나에게 주어진 온전한 나만의 시간에는 나를 탐구하는 활동들을 해나가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일들로 하루를 상쾌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사회의 시선에서 고생한 나 자신에게 그 정도의 휴식과 보상은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쓰고 다양한 경험을 찾아 나선다. 회사에서의 나만이 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나는 마케터 써니주가 아니라 그냥 인간 써니주라는 것을. 그러한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에는 회사에 의존하지 않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그러기 위해서 모범생이자 퇴준생이 되어버린 27살의 나는 오늘도 그 여정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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