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해 듀오, 없으면 결혼 못해 듀오.
*하단의 음악(플레이리스트)과 함께 감상하시면 좋습니다.
- 목 차 -
결혼식 알람이 울렸다.
회사와 병원을 오가며, 더운 여름 햇살을 피해다녔던 6월 어느날 알람이 울렸다. 아이폰 화면에 '내 결혼식'라고 떴다. 그렇다. 나는 30대 중반 화창하고 따뜻했던 봄날 시원하게 '파혼'했다. 그것도 상견례 당일. 대개 상견례는 어른들의 덕담이 오가고, 결혼식을 챙기며 서로가 배려하고, 감사하기 마련인데, 나의 상견례는 그렇지 못했다. 예식장 예약을 다하고, 청첩장을 다 찍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인사도 나누러 돌아다녔지만, 나는 상견례 당일 신부가 될 뻔한 사람과 현실적인 괴리를 좁히지 못하고,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생각했던 결혼은
내가 생각했던 결혼은 이랬다. '서로과 삶과 비전을 공유하고,부족한 부분은 채워가며, 함께 가꿀 터전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x소리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루에 4시간 정도 잠을 자며, 글쓰기와 음악틀기로 월급 이상의 무언가를 모았던 돈과 노력들은 그와 함께 살 터전을 구할 때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서울의 집은 두 직장인의 월급을 합친 것과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을 합해도 쉽게 구해지는 가격이 아니었다.) 이 즈음에서 부모님께 손을 벌려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집안 사정이 있듯, 우리집은 내가 1살때부터 어머니께서 홀로 일하시며, 독립가정을 이룬 특이한(?) 집이었다. 자식 하나있는 거 대학과 직장 보내겠다고, 물심양면으로 나를 길러준 어머니께 결혼으로 인해 더 이상의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이런 우리 사정을 인지하고, 자신이 가진 돈의 일부를 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 돈이 어머니의 노후자금이고, 어머니 수중에 그게 전부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결혼할 상대를 설득해 우리가 결혼할 때 서로의 부모님께 손 벌리지 말자고 설득했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합의'와 '행동'은 전혀 달랐다
하지만, 우리가 이룬 그 '합의'는 얼마 안가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직장이 강남이니, 성동이나 강남으로 무조건 집을 얻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나야 어려서부터 1~2시간 통근을 당연히 생각해, 속으로 '그게 무슨 소리야?’ 라고 반문했지만, 반려자가 될 사람의 편의도 우선이었기에 성동구와 강남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수중에 모아두었던 돈과 은행 대출을 모두 끌어들여 살 수 있는 집은 그 동네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강력하게 주장한 무언가가 있기도 했고, 집은 어차피 함께 가꾸어갈 곳이니, 나 또한 ‘합의’를 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집을 구하는데, 당신도 도움을 주면 좋겠어. 우리가 살 터전을 함께 만들어 가면 고마울 것 같아." 당연한 것을 이야기했지만, 순간 죄인이 된 기분으로 말했다.
그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진지하게 함께 생각해보자 했고, 집에 관련된 것을 하나 둘씩 살면서 꾸며가자 했다. 예물이나 예단 이런 것들은 서로가 부담이 되지 않게 부모를 설득하여 생략하고, 정말 살면서 필요한 것과 최소한의 예식을 하자 했다. 그는 "알겠다."고 했고, 난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뭘 잘 못했나 돌이켜보니, 내 통장 잔고가 잘못했다.
상견례 며칠 전에 그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오늘 끝나고 백화점으로 와." 나는 어느 순간 내 분수에 맞지 않는 까르티에, 롤렉스의 시계와 반지같은 예물을 보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한 번 뿐인 결혼, 당연히 이런 것을 해야한다고 했다. 집에 무리를 했으니, 다른 것은 포기하자 했던 이야기는 무시되었다. 그 날 후로 계속 그의 '바람'과 '허상'이 나의 능력과 삶의 흔적들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라지만, 우리의 현재 상황과 맞지 않은 과분한 것들은 지금 시점에서 할 필요가 없었고, 할 수 조차 없었다. 다시 이야기했다. 우리가 집은 함께 살 곳이고 무리를 하니까, 다른 것들은 과감하게 포기하자고. 그는 맘에 안 들어했고, 나한테 이런 것도 못하냐며 백화점 로비에서 쏘아댔다. 내가 무엇을 잘 못 한 것일까? 내 통장 잔고가 잘 못 된 것이겠지.
상견례 당일
상견례 당일이었다. 어머니는 이런 상황을 모두 목도하고 있으면서 휴대폰 한 쪽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 놓으셨다.(예전 어머니의 핸드폰을 정리하다. 발견한 글)
"내 아들과 반려자가 될 친구와 그의 어머니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해주세요. 감사비가 온 뒤 새 생명이 돋아나는 땅의 기운처럼, 이들을 축복하게 해주세요. 미래 이들이 꾸려갈 가정의 가능성을 보고 지금은 서로가 조금 부족한 부분은 양보하고 단촐하지만 서운하지 않고 인정하고 배려하게 해주세요"
어머니와 내가 먼저 식당에 자리를 잡았고, 10분 정도 후에 그 친구와 어머님께서 도착했다. 상대의 어머님은 우리 어머니의 행색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눈으로 위 아래를 흩어 보셨다. 첫 단추부터 잘 못 끼어진 기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눈이 흔들리는게 보였다. 에피타이저가 무슨 음식이 나온지도 모르게, 식장과 스케줄 이야기가 오가고, 덕담이 오가던 찰나에 아주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가 우리 가족에게 들렸다.
"얘 언니도 홀어미와 외아들이 있는 집으로 시집가서, 얘는 아들 형제가 좀 있는 집으로 결혼을 보내 데릴사위로도 삼고 싶고 뭐 그런 맘이 있었어요. 얘도 지 언니처럼 홀어미에 외아들인 집으로 시집가겠다고 할지는 생각도 못했네요.근데, 사생아라고 하던데....."
내가 무언가를 잘 못 들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나의 어머니는 소리없이 울고 계셨다.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왜 상견례 식장에서 말씀하셨는지 모르겠다.) 오늘 처음 만난 어떤 어른이 나의 어머니의 인생을, 우리가족의 조건을 비아냥대고 있었다. 참을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집은 남자가 해오고, 예물은 여자가 하겠다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방식을 그 어른께서는 고수하셨고, 나와 그 친구의 결혼을 준비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찰나에, 그녀 역시 어머니에게 불만을 얘기한 것이 이런 형태로 상견례 자리에서 나왔던 것이었다.
도저히, 더 이상 무언가를 진행시킬 수 없었다. 대부분 혼자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어린 시절, 동네 친구가 생기면 반갑게 놀다가도 "애비없는 새끼가 왜 우리 xx이랑 노니?", "너는 결손 가정에 있으니,우리 아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거라." 같이 친구 엄마들이 나를 찾아와 쏘아대 더 이상 친구를 만들 수 없었던 서글프고 아픈 어린 시절을 30대에 또 맛보게 되다니. 인생의 반려자와 내 편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가장 남의 언어로 채찍질 당한 기분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송곳으로 후벼파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길러준 어머니의 헌신과 노력을 하찮게 만든 그 언어와 태도가 용납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그 친구의 어머니가 나에게만 했다면, 내가 어느 정도는 걸러들었을 것이다.)
결혼을 버리고 파혼의 길을 갔다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이, 좋은 음식을 느낄 겨를 없이, 상견례가 끝났다. 분에 참다 못한 어머니는 그때까지 참고 있던 눈물을 집에 돌어와 터트리셨다. 가슴이 찢어졌고, 죄송함에 몸둘바를 몰라, 스트레스가 심하게 왔다. 내 몸도 그 동안의 인지부조화와 부조리한 타격에 견디지 못했는지, 반신마비 증상이 왔고, 한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또한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간 어머니께서도 몸져 앓아 누우셨다. 전화가 왔다.
"오빠 어떻게 할 거야?", "몸은 어떻냐? 괜찮냐?"라는 질문이 먼저일텐데. 자신의 상황만 챙기는 것 같은 그가 미웠다. 아니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병상에서 전화기를 든 채 20분간을 가만히 있다가 속에서 맴돌던 말을 내뱉었다.
"우리 결혼 없던 걸로 하자.여기까지라고 생각하자."
"오빠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 이미 주변에 다 말했어. 결혼을 무를 수 없어. 만약 결혼을 무르면, 위약금은 오빠가 내야해."
정말 끝까지 구질구질해졌다. 이미 우리 둘은 끝이 났고, 막장으로 가고 있었다. 더 이상의 통화는 무의미했다.
결혼은 무슨 짓일까?
결국, 집도 구하지 못했고, 결혼하지 못했으며, 당시 다니던 회사조차 그만두고 친구와 스타트업 해보겠다고 몇 년을 방황했다.
당시 어머니께서는 메모장에 이렇게 쓰셨다.
"어제까지 아니 오늘 현재 이렇게 되었다. 너도 나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 난관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시비를 가리고 싶지 않다. 이제 내겐 결혼이란 게 영화 제목 말마따나 미친짓 같다. 아니 남 하는대로 가랑이가 찢어져라 하고 숨이 턱에 차오르고, 밤 잠을 못자게하는 이 모든 것에 매여 하는 것이 말이다. 달리 생각할 수 없는 게 현실이냐."
시간이 흘렀고, 나는 연애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혼자 살아도 별 아픔없을 자신의 생태계를 만들었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더 먹으니, 결혼을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결혼해 듀오, 없으면 결혼 못해 듀오
우리나라에서 결혼을 하려면 약 2억 3600만원 (2021년 기준) 정도가 든다는 기사를 봤다. 3~40대 직장인의 평균 월급 326만원에서 생활비를 떼고, 200만원씩 약 10년 정도 모으면 완성되는 돈이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현재 평균 취업 연령이 30세니까 이들이 최소 준비 상태에서 결혼하려면 약 40세 정도가 된다.
결혼 정보 회사는 언제나 그렇듯 학벌, 부모의 재력, 회사상태, 연봉 등을 기준으로 결혼의 적합성을 재단한다. 자신의 삶과 경험을 바탕으로 일군 터전과 기준은 그 앞에서 의미가 변질된다. 결혼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기준과 점수에 미치지 못하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걸 무시한채 정부는, 어른들은 결혼하라 재촉한다. 우리 사회에 비혼자가 늘고 있다고 걱정한다.
어찌보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의 소망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결혼 정말 미쳐야하는 것일까? 현실적인 것이 충족이 안된 상태에서 결혼은 쉽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결혼 후, 어느 순간 사랑이 식고 일상을 살게 되면 '그냥' 의무감에 살아야하는 게 결혼인 것일까? 결혼하려는 사람들은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플레이리스트 그냥 5편 결혼을 꿈꾸는 자들을 위한 노래
Coldplay - Daddy
Regina Spektor - Us (500일의 썸머 OST)
U.N.C.L.E- Lonely S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