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없던 나에게 아버지였던 할아버지 국어학자 이수열 선생님
Music in Books #1.
상실의 시대, 비틀즈 그리고 할아버지
“비행기가 착륙하자 금연 등이 꺼지고, 기내의 스피커에서 조용한 배경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어떤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즈(the Beatles)’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나를 혼란 속에 빠뜨렸다.
아니, 다른 때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격렬하게 내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1장 , 18년 전 아련한 추억 속의 나오코 중에서
Phase 1. 소설과 음악의 이야기
《상실의 시대》의 원제는 비틀즈의 노래〈Norweigian Wood〉다. 20살을 갓 넘긴 영국 리버풀 출신 청년들이 세상을 점령하고, 음악적 성숙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발표한 앨범이 <러버 소울 Rubber Soul(1965)>인데, 현재에도 작품성과 대중성을 높게 평가받는다.
▶ 비틀즈의 <러버 소울 Rubber Soul(1965)> 레코드
〈Norweigian Wood〉는 앨범 <러버 소울 Rubber Soul(1965)>에서 두 번째로 실린 곡이다. 라비 샹카 (Ravi Shankar)의 시타와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의 어쿠스틱 기타가 어우러져 다층적 화음을 만들어내는 이 곡은 존 레넌(John Lennon)의 몽환적인 목소리가 어우러져 신비로운 이미지의 숲을 창조해낸다.
이 노래는 소설에서 훨훨 타오는 횃불처럼 뜨겁지만, 불안정한 청춘의 잔향을 불러일으키는 청각적 이정표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주인공 와타나베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 기즈키가 삶의 끈을 놓아버렸을 때, 절친인 와타나베가 기즈키의 여자친구인 나오코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사랑이 엇갈릴 때 그리고, 다른 사랑을 갈구할 때, 비틀즈의 〈Norweigian Wood〉는 '기억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 신기한 것은 약 2분의 짧고 간결한 매력이 숨겨진 노래 〈Norweigian Wood〉는 적어도 소설을 읽은 사람들에게 ‘회상’과 ‘치유’의 음악이 된다.
Phase 2. 관련한 어느 삶의 한 대목
20대 늦봄, 어느 날, 대학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던 중 친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랜 시간 마음의 병을 갖고 살던 친구는 버거운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데이빗 보위를 좋아했던 친구는 마치 소설《상실의 시대》 속 한 장면을 오마주하듯 자신의 방 바닥에 하루키의 작품들과 보위의 음반들을 늘어놓은 채 떠났고 그 후 나는《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지 않았다. 아니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세월이 갈수록 비틀즈의 음악에 더 빠져들었다. 20대에 순수하게 느꼈던 책, 음악, 사람, 그리고 사랑의 테마가 비틀즈의 노래에 응축되어, 삶의 다른 의미를 줄 때도 있었다. 와타나베처럼 마음 한 곳에 숨겨놓은 친구와의 소중한 추억을 끄집어내는 연료가 바로, 비틀즈 음악이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나와 가족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봤다. 할아버지는 1928년 2월 파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교원자격증을 딴 국어학자 이수열 선생(클릭 시 KBS뉴스 연결)이다. 퇴직 후 바른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빨간펜을 들고 신문 칼럼의 비문을 바른말로 고쳐 보내기를 약 28년 동안 하셨다. 그동안 약 5,000여 명의 교수, 기자들에게 약 2만여 통의 편지를 보내셨으니, 우푯값도 꽤나 쓰셨다.
▶ 국어학자 이수열 선생님, 나의 할아버지
온 마음과 열정을 바쳐 우리말을 지켜 온 할아버지께서는 신장암 4기로 더는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천천히 언어를 잃어갔다. 질화로의 재가 식어가듯 할아버지의 체온과 영혼도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20대 친구와의 작별이 내 불행의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 나의 불행과 상처와 고통은 특별하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다. 살면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일들이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이니, 그것을 겸허히 수긍해야 한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의미를 그려내고 싶은 마음으로 《상실의 시대》를 썼다. 그건 연인과의 강렬한 사랑의 순간일 수 있고, 가장 찬란한 시기를 함께 보낸 친구에게 보내는 사랑의 마음일 수 있으며, 한평생 열정을 쏟았던 노학자에 대한 사랑의 헌사일 수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삶, 사람, 사랑의 어원이 같은 것이라며, 사람이 사랑을 해야 삶이 풍부해진다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아버지같았던 할아버지와의 작별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남기겠지만 할아버지께서 유산으로 남겨주신, 세상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기억'과 '정신'을 더 기억하고 싶다. 한 시대의 어른과 작별하는 '상실의 시간'에 비틀즈의 〈All You Need Is Love〉와 〈Across the Universe〉를 새겨놓으려 한다.
the Beatles - All You Need Is Love
https://www.youtube.com/watch?v=we0tO0LxY8Y
the Beatles - Across the Universe
https://www.youtube.com/watch?v=4EGczv7ii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