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내전이 한창인 1923년. 작은 섬마을 이니셰린에는, 본토에서 들려오는 포탄 소리만큼이나 심각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동네에서 알아주는 술친구인, 콜름과 파우릭의 우정 전선에 먹구름이 낀 것.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별안간 콜름이 파우릭에게 이별을 선언했다. 이유는 그냥 네가 싫어졌다는 것. 당황스러운 파우릭은 단순한 우울감 때문이라 생각하며 관계를 개선하고자 다가가는데, 콜름의 태도는 완강하다. 바이올린 연주를 사랑하는 예술가이지만, 이대로 계속 귀찮게 하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겠다며 협박하는 콜름. 파우릭은 아무런 예고 없이 친구의 인생을 가로막는 머저리가 된 기분이다. 관계를 끝내고자, 혹은 지속하고자 하는 각자의 절박함은 집착이 되고, 이젠 두 사람을 삼키기 직전이다. 죽음을 예고하는 요정 밴시가 이들에게 나타난 것처럼.
# 좋다는 말의 가벼움
오래전에 한 글쓰기 강좌에서, 당연하지만 쉽게 간과되는 작법 요령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좋다’라는 형용사 대신, 구체적인 수식어를 활용하기. 현상을 바라보는 내밀한 마음이 분명히 있을 텐데, ‘좋다’는 단어로 단순하게 퉁쳐 버리지 말라는 조언이었다.(실제로 강사님이 퉁친다는 단어를 쓰셨음)
쉽게 글쓰지 말라는 호통같아도, 우리의 마음은 어휘 하나로 담아내기엔 커다랗지 않냐는 따스한 말로 들렸다. 풍성한 단어 사용을 장려했던 그날의 원포인트 레슨. 문장 넘어 나의 삶에도 조금씩 영향을 주었다. 적절한 가치관으로 퉁치며 살았을, 내 이야기를 발견하도록.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의 파우릭도 비슷한 고민에 빠진다. 어수룩하고 지루한 대화상대일지 몰라도, 모난 데 없는 마음으로 이웃을 대했던 파우릭. “무엇 때문에 싸우든 간에 행운을 빈다”며 멀리 들리는 포탄 소리를 향해 내뱉는 그의 혼잣말 속엔, 뭐가 됐든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그의 심성이 엿보인다. 그런 부드러움 덕분일까. 모두 무시하는 동네 바보 도미닉은 파우릭을 마을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이라 여긴다. 하나 남은 가족인 여동생 시오반은 애틋한 마음으로 오빠 옆에 남아있다. 파우릭은 죽을 때까지 아무런 의문 없이 이렇게 살아갔을 터다. 한 걸음 더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미 ‘좋은’ 삶을 살고 있으니까. 절친이라고 생각했던 콜름이 다짜고짜 절교 선언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느닷없이 평생을 살아온 모습을 부정당하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타인의 판단으로 내가 살아온 인생에 공식적인 별점이 측정되는 건 아님에도, 외부의 부정적 평가를 머릿속에서 지워내기란 쉽지 않다. 특히 자신의 강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더럽혀지면, 밤잠을 설칠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의 상실을 두려워한다’ 영화를 연출한 마틴 맥도나 감독이 이 문장을 영화의 핵심문장 중 하나로 삼은 걸 미루어보면, 우리의 어떤 모습에 집중하려는지 파악된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기준을 잃어버렸을 때의 공포. 그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파우릭도 자신을 지탱하는 유일한 가치가 흔들린다. ‘똑똑한 예술인’이라 둘이 그리 어울리진 않았다는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묻는 파우릭. 그저 ‘좋은 사람’이란 대답에 충격이다. 매일 가졌던 맥주 타임은 끈끈한 우정의 증거인데. 그 관계의 바탕에는 다정하고 유쾌한 ‘좋은’ 인간이 존재했는데. 이제 그에겐 물음표가 박힌다. 이 수식어는 명확한 캐릭터가 없는 이에게 붙여주는 가벼운 별칭이었던 걸까. 콜름의 지적처럼 지루한 말만 쏟아내지만, 그동안 듣고 넘어가 줬던 이웃 간 배려의 산물이었을까.
# 귀 기울이니 절박함이 들려서
누구든 파우릭처럼 자신의 인생이 가벼이 형용 되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 분노하고 좌절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거쳐 보지만, 도저히 그의 통찰로는 평정심을 찾기가 어렵다. 끊임없이 밀어내는 콜름에게 나를 부정하지 말아 달라며 집착하는 게 전부다. 당연히 개선엔 도움이 안 된다. 그럼 방법은 한가지. ‘좋다’는 표현 대신 구체적인 수식어를 찾으라는 작법 수업처럼, 무엇이 나를 진정 존재하게 하는지, 어디서 활력이 불어오는지 귀 기울여보는 것. 나를 지탱하는 기준이 당연히 있었겠지만, 개론만으로 버티기 힘들다면 심화 과목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곳에 나만의 명확한 빛깔이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콜름 역시 이와 같은 사색의 시간을 가졌으리라. 영화상으론 시작한 지 겨우 5분 만에 이별 메시지를 던지지만, 사실은 훨씬 이전부터 오랜 시간 곱씹어 내린 결론이었을 터다. 동네 맥줏집에 앉아서 큰 동요 없이 시시덕거릴 수 있는 삶도 ‘좋은’ 인생일 수 있겠지만, 콜름에겐 어느 순간 위기로 다가왔다. 안 그래도 무료한 작은 섬인데 여생을 파우릭과 당나귀 똥 얘기로 보낼 생각을 하니, 음악인으로서의 자아가 피폐해간다 느꼈던 콜름. 더욱이 친구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파우릭보다 훨씬 연배가 높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라 남은 시간에 대한 압박도 한몫했지 않았을까.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이야기를 파고 들어가니 그가 내릴 답은 하나였다. 상대에게 가혹하고 잔인할 수 있지만, 단칼에 관계를 거부하는 것. 이것이 콜름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별은 두 사람이 하는 거라지만 대개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걷어내는 형상이라, 멀리서 보면 감정에 폭력을 가하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비치기도 한다. 혼란에 빠져버린 오빠를 대신해 “갑자기 절교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그것은 못된 짓”이라 화를 내는 시오반. 당신은 심사숙고의 시간을 거치며 차근히 감정을 정리했지만, 통보받는 당사자는 똑같은 온도를 맞춰 줄 수 없는 법이니까. 콜름 자신도 이기적인 행동임을 아는지 불같이 화를 내는 시오반에게 이해해달라는 말을 전한다. 심지어 영화 중반, 동네 경찰에게 무기력하게 당한 파우릭을 말없이 부축해 곤경을 벗어나게 해주기도 한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마음속 한쪽에 파우릭의 잘못이 아니라는 불편함이 분명 보이는데, 어째서 음악인으로서 손가락까지 포기할 마음마저 비치며 서로를 후벼파야 하는 걸까.
이에 마틴 맥도나 감독은 ‘절망이 가져다주는 순수한 절박함’으로 영화의 캐릭터를 쌓았다고 대답한다. 팬데믹을 겪으며 모든 예술 활동의 손발이 잘려 나가도 세상은 어떻게든 돌아가던 때, 이대로 자신이 존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위기를 느꼈던 맥도나 감독. 마치 체제의 충돌로 세상이 어지러워도 그저 맥주 한잔이면 그만인 이니셰린의 위화감처럼, 상실을 상실로 여기지 못하는 세상에 훨씬 무서운 슬픔, 즉 무의미함을 마주한 것이다. 이는 남은 인생이 덧없을 것이라 예고하는 콜름의 아픔과도 닮아있다. 더 이상 견고한 내 세상이 아닌 순간, ‘좋은’ 예술가라는 수식어로 퉁치고 있었던 것을 아는 순간, 감독은 절박한 마음으로 펜을 다시 들었다. 그렇게 콜름도 움직였다. 내밀한 나만의 색을 잃지 않기 위해, 절박한 마음으로.
#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부정당한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집착하는 파우릭. 그리고 자신까지 해할 정도로 다가올 틈 하나 내주지 않는 콜름. 이처럼 영화 <이니셰린의 벤시>를 보고 있으면 나의 상실을 막고 자아의 각성을 원하는 두 남자의 고군분투가 가장 크게 보인다. 하지만 콜름을 연기했던 배우 브랜단 글리슨에 따르면 감독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마틴의 모든 것은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항상 그렇게 보이진 않더라도.” 그는 인터뷰를 통해 감독과 대화를 나누다가 느꼈던 바를 전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분명 과격하다. 안쓰러울 정도로 답답하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사랑에 비춰보면 의아스럽다. 어디에 도대체 사랑이 있다는 거지. 그러나 마음에 생채기가 나도 서로에게 가해진 신체적 폭력에 슬퍼하고 마음을 쓰는 두 사람을 보면, 깊은 곳에 남아있는 불씨가 느껴진다. 단칼에 돌아서는, 혹은 거절을 인정하지 않는 이기심만 보일지 몰라도, 이들이 이토록 애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구나.
양손에 들린 무게가 확실히 다르다면, 기회비용이 명확히 구별된다면 둘 중 하나를 내려놓는데 이토록 고통스럽진 않을 터다. 허나 여기서 문제는 우리의 어깨에 물리학, 경제학을 뛰어넘는 특별한 아이템이 얹어진다는 것. 바로 당신을 향한 애정. 파우릭의 복수심에 미안함이 서린 건, 오후 2시가 상징하는 둘만의 역사 덕분이고, 콜름의 단호한 눈빛에 슬픔이 비치는 건, 파우릭의 다정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이다. 내 본능을 막아서는 장애물인 건 분명한데, 제거하자니 어느새 몸에 일부가 돼서 결국 잘라내는 고통과 맞먹고 만다. 가슴에 난 구멍을 막기 위해 손가락을 내주는 마음으로.
고통을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모두 손에 손잡고 내려놓을 일 없이 걸어가면 눈물 흘릴 이가 누가 있을까. 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좋은’ 패러독스에 갇혀있는 내가 있고, 살기 위해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땐 “모든 캐릭터의 여정은 고통과 고통을 처리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라 전하는 콜린 파렐(파우릭 역)의 소회를 떠올려보자. 아픈 선택을 앞두고 있다면, 인생 여행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그 슬픔 속엔 반드시 있을 것이다. 내가 치열하게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따뜻한 증거가.
# 최근 아일랜드 내전 시절 영화를 우연하게 여러편 보게 됐다. IRA가 뭔지, 그리고 그 사이에 벌어진 같은 민족간의 정서적 고통은 무엇이었는지, 세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깨너머로 느끼긴 했다. 예술작품으로 세계사를 공부했다고 하기엔, 우리나라 역사를 한국영화로 배웠다는 외국인 마인드일 것 같아서 섣불리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하다. 진짜 지식이 되려면 역사서를 찾아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