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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달 Jul 21. 2024

[우드잡] 인생을 이완시킬 아로마 향은 내 안에 이미

모두가 즐거운 고등학교 졸업식.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는 유키는 대학 생활도 연애도 한순간에 놓쳐 실의에 빠진 상태다. 주변에 남은 건 똑같이 엉망진창인 친구들 뿐. 새벽녘을 헤매던 유키는 우연히 산림 연수생을 모집하는 전단을 마주치고, 무작정 연수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예쁜 모델에 눈이 홀라당 넘어갔던 건 사실이지만, 무쓸모의 굴레를 벗어나고픈 의지가 더 크게 작용했던 걸까. 도망의 유혹에도 혹독한 연수 과정을 거치고 어엿한 수료생이 된다. 


그러나 뿌듯함도 잠시, 그가 투입된 가무사리 마을은 속세로부터 깊이 떨어진 디지털 제로 구역. 게다가 전통적인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방식도 기이하다. 함부로 덤빌 수 없는 대자연의 무게감까지, 도시에선 느낄 수 없었던 벽이 숨을 조이며 버티기가 녹록지 않다. 그런데 이건 뭐지. 막막함 사이로 도시에선 느낄 수 없었던 향기가 파고든다. 백 년의 세월을 천천히 흘러온 나무가 유키에게 묻는 듯하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딘지.

   


누구나 계획은 있다

개인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고안됐던 성격 유형 검사 MBTI. 우리나라에선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정반대의 성향을 비교하는 공감 게시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중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성향이 있는데, 바로 계획적인 삶을 두고 다투는 ‘P(인식형)’와 ‘J(판단형)’


‘P형 인간은 아름다운 즉흥을 외치며 계획 없음의 자유를 선포한다. ‘J형 인간은 준비가 완성을 만든다며 유비무환의 자세를 강조한다. 싸움 붙이기 딱 좋은 그림이야. 그런데 계획 욕구의 여부만으로 이렇게 인간의 유형을 딱 잘라 구분해도 되는 걸까.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고를 최대한 열어놓는 인식형(Perceiving). 이들은 깔끔한 해답을 요구받을 때 긴장한다. 전문가들은 계획을 완성 시키는 데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한편 판단형(Judging)은 상황을 매뉴얼에 맞춰 정리하고 다음 스텝을 확보하는 타입이다. 미흡한 정보에 삐끗하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통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계획에 집착한다고 분석한다. 


이렇게 특정하니 서로를 외계인처럼 보는 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대척점의 결괏값을 거꾸로 쫓아가면, 희한하게도 가운데 하나의 점에서 만난다. 불확실한 미래를 마주하지 않으려는 강력한 몸부림. 모두의 시작점엔 인간이기에 생기는 불안감이 들어있었다. 무계획이 계획이라던 영화 <기생충>의 기택도, 이상한 게 아니라 성실한 것이라던 영화 <플랜맨>의 정석도, 기대했던 예상이 뒤집힐까 무섭기 때문인 거다. 이처럼 우리는 계획하지 않거나, 끝까지 계획하려 한다. 계획이 망가질까 불안하기 때문에.


영화 <우드잡>의 유키는 기택과 정석에 비하면 훨씬 막막하다. 어영부영 시류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터라, 다리에 힘주는 법도 잘 모르겠다. 알 수 없는 내일은 우리를 불안케 하지만, 방향조차 잡지 못한 막연함은 뇌를 멈추게 하거든. 하지만 그 덕에 단순한 포스터를 따라나설 용기가 오히려 생겼는지도 모른다. 도시의 실패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꿈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게다가 그런 나에게 전단 속 그녀가 미소까지 던져주니까. 유키는 어느새 계획이란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다.



불안은 숙명이지만

목표는 바라볼 땐 다정하지만, 쫓기 시작하면 가혹해진다. 넘어지고 쓰러져도 피와 살이 될 거란 말은 결국 정상에 오른 이후에나 쓸 수 있는 법. 물론 과정 없는 결과 없고, 고통이 근육을 만들어 주는 건 사실이다. 미래에 불안이 따라오는 게 당연하다면, 위기를 못 느낄 땐 정체 되어 있단 말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말이 쉽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순례길을 바라보고 있으면, 공포가 턱 하고 밀려올 때가 있다. 남자답고친환경적이고지구랑 친해지고 싶다고 친구들에게 외치던 유키의 호기로움도, 핸드폰 전파장애 앞에서 딱 끊어져 버린 것처럼.


헌데 세상은 생각보다 밀당을 잘해서,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작은 당근을 하나씩 던져준다. 지난날의 고통을 긍정적으로 바꿔놓는 당장의 성취.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왠지 가학적이나, 그 꿀 같은 찰나에 미쳐버린단 말이지. 아마도 성장통의 공식이 우리 몸에 박혔기 때문일지 몰라. 유키 역시 허접한 몸뚱아리로 겨우겨우 버텨냈지만, 수료장을 손에 쥐고 나니 결국은 뿌듯하다. 


곧바로 투입될 실제 현장은 연수 때와는 달리 살벌할 것이다. 더욱이 유키가 배정된 가무사리 마을엔 사납기로 소문난 요키 아저씨가 있기도 하다. 그런데 못할 게 뭐 있겠어. 지금의 성취감이 진통제가 되어줄 테니까. 주머니에 고이 접어둔 표지모델 그녀에게 금방이라도 닿을 것만 같은 유키. 하지만 목표를 처음 세워봐서 몰랐지.  상상 초월 업무에 임업인의 포부는 무너지고, 원초적인 저녁 식사에 일상마저 경악한다. 수료증의 효과는 이미 끝났고, 그나마 힘을 주던 그녀의 사진은 보이지 않는다. 남은 시간을 버틸 생각에 막막하다. 숨겨진 세상의 비밀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성취의 약발엔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누군가에겐 그저 근성 없는 청년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 모습 왠지 익숙한 기분은 뭐지. 팍팍한 삶이라 작은 레벨업도 어려운 요즘. 웃음기 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가 슬쩍 스친다. 계획이 있었는데 없어지고, 환호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이쯤 되면 성취의 주사 한 대 맞아야 하는데. 다급해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가무사리 마을 사람들의 말버릇인 나아나아(천천히 하자마음을 가라앉혀)’의 자세가 필요한 건 알겠는데. 불안을 달고 사는 건, 인생 계획에 속박되어 사는 우리의 숙명인 것 같아서 말야.


이에 영화를 연출한 야구치 시노부 감독은, 실제 임업인이 살아가는 삶의 모양 속에서 나아나아’ 의 힌트를 얻었다고 전한다. 백 년 후에 팔릴 나무를 기르며, 그 결과가 당신들의 삶 이후에 완성되더라도 지금 그 일을 한다는 사람들. 자료 조사차 만난 임업인의 인터뷰는 영화 속 ‘나카무라 임업’ 사장의 대사가 된다. 농업은 내가 키운 채소의 맛을 보며 보람을 느낄 수 있지만임업은 아니야우리가 한 일의 결과는 죽은 다음에 나와그런 거지 뭐.”


성과는 모름지기 내 손에 들어와야 의미가 있는데. 사후로 넘겨버린 담담한 말투가 뒤통수를 친다. 문득 영화를 되짚어 보게 된다. 그동안 등장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다시 보인다. 나무 하나 자르면 배부르게 먹고오늘도 늙는다며 노동요를 부르던 사람들. 유키에게 “읍내까지 차로 두 시간이면 가까운 거리니까걸어서 천천히 다녀오라는 동네 어귀 할머니들. 이들의 미소는 단순한 여유가 아니다. 백 년을 넘게 자랄 나무의 하루를 가꿨다는 것으로 오늘을 만끽할 수 있는 마음. 욕심이 삶의 터전의 크기를 넘어서지 않는 기준. 성취의 개념을 초월하려는 자세가 나이테처럼 단단히 새겨있다. 이러니 마을에 피톤치드 향기가 가득할 수 밖에. 인생의 근육을 이완시켜주는 그런 향기가.



주문만 외운다고 될 일이면

평정심은 언제나 미덕으로 불린다. 뭐 꼭 대단한 일이 아니어도 호들갑 떨고 싶은 사람은 없다. 가무사리 마을 사람들처럼 생의 완성에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나아나아'가 입버릇처럼 나오면 얼마나 편하겠어. 어찌보면 언제나 빠른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도시인들에겐 가혹한 주문인가 싶기도 하다.


야구치 시노부 감독은 취재 당시 그들의 생기를 오롯이 전달받는 기분이었다고 전한다. 그는 억지 텐션이 아닌 자연스러운 현장의 생명력을 체험했다. 천천히 편안하게 자기속도를 잃지 않는 사람들. 감독은 임업인들에게 배운 두 번째 지혜를 영화에 담아낸다. 가무사리 마을 사람들은 흙과 잔디, 그리고 동물의 냄새와 어우러져 살아간다. 입산할때 반복하는 기도는 그저 관성이 아닌 산신을 향한 진심이 묻어난다. 이런 리얼리티는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무속신앙에서 정점을 맞는다. 마을 축제에 등장한 섹슈얼한 형상들. 허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함박미소를 보내는 모습에, 음지로 숨겨놨던 불편함은 어느새 사라진다. 


인생의 계획을 사후로 확장하지 않더라도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힌트가 여기에 있었다. 자신의 위치를 순수하고 뜨겁게 인정할 때. 내 향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받아들이며 살아갈 때. 비로소 나아나아한 인간이 된다.


현장의 생기를 최대한 전달하기 위해 나무에 오르는 배우들에겐 대역 없이 연기를 주문하고, 산은 디지털이 아닌 필름으로 촬영했다는 감독. 덕분에 백 년을 지낸 나무의 향기가 10년이 지난 OTT 화면에도 은은히 퍼진다. 향기 끝을 자세히 음미하고 있으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세대를 거치며 나무를 길러온 가무사리 마을 사람들처럼. 너도 느긋함의 향기를 네 주변으로 이어가라고. 이젠 내 손에도 바톤이 들렸다.

자 다음 받으실 분 찾아요.











*본문에서 언급한 나아나아는 영화 <우드잡>의 원작소설인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에 더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영화는 느긋한 태도만을 차용했다면, 소설은 직접적인 대사를 통해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전해준다. 가무사리 마을을 좀 더 깊이 체험하고 싶다면, 책도 읽어보는 것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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