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의 부고를 들은 여덟 살 소녀 넬리. 부모님과 함께 엄마의 어린 시절이 남아있는 시골집으로 향한다. 애꿎은 미소로 물건을 정리하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넬리도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지 못해서 속상하거든. 그저 엄마가 오래전 지었다는 오두막을 궁금해하는 것이, 마음을 전할 최선의 노력이다.
이런 걱정을 모르는지 엄마는 말도 없이 먼저 집을 떠났다. 남은 짐을 정리하는 아빠에게 괜히 씩씩한 모습을 보이며 숲으로 향한 넬리. 그곳에서 혼자 나무를 옮기고 있는 또래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자신만의 아지트를 짓고 있는 소녀의 이름은 마리옹. 자신과 꼭 닮은 소녀와 순식간에 친해진 넬리는, 이내 눈치챈다. 마리옹은, 아이였던 시절의 엄마라는 걸. 같은 눈높이의 천진난만한 표정 속에서, 역할을 벗어던진 인격을 마주한 넬리. 넬리는 그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엄마는 물론이고 자신의 불안함마저 다독일, 위로의 방향을.
# 역할이 숭고한 탓에
어느 날, 5살 난 아이는 서랍에서 명찰을 하나 발견한다. 한글을 읽는 데 재미 들였던 아이는 물건 속 글자를 천천히 중얼거린다. 그리고선 이상한 표정으로 엄마에게 명찰을 건네며 물었다. 여기 쓰여 있는 이름은 누구냐고. 글자를 읽은 아이가 기특했는지 엄마는 자신의 이름이라 알려준다. 그러자 아이는 놀란 눈으로 울먹인다. 엄마 이름이 엄마가 아니라니. 엄마 이름은 김엄마인데. 5년 동안 일궈온 아이의 세계가 무너진다.
귀엽고 우스운 에피소드지만, 한편으론 있으면서 없는 존재의 혼란이 묻어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었는데, 새로운 등장인물이 지난날을 지워버렸다. 육아가 시작되고부터 이름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 엄마라는 역할은 숭고하지만, 자신이 없어져도 괜찮은 만큼일까. 라고, 고민할 시간이 있으면 우는 아가 한 번 더 업어줘야 한다. 부모의 역할은 그렇게 본캐를 압도해버리기 시작한다.
이 혼란은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다. 분명 자신을 엄마라고 소개했으면서, 이제 와서 진짜 모습이 따로 있다니. 하는 일도 없는데 물심양면 퍼주는 탓에, 신과 함께 사는 기분이었단 말이지. 그런데 언어를 배우고 사회적 관계를 이해하면서부터 뭔가 이상하다. 전지전능 너머 바스러진 모습들이 언뜻 스친다. 아이는 미숙하지만, 뭐라도 해야 한다. 겁이 나서 울던지, 모른 척 입을 다물던지. 안전한 연극무대가 막을 내리지 않도록.
“이번이, 우리가 보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영화 <쁘띠 마망> 속 넬리의 할머니는 생전에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이 말에 담긴 삶의 불확실성을 떠올리면, 상실에 대한 불안은 당연하다. 이를 해소하려 인류는 부단히 노화와 싸우고 생명을 붙잡는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선택한(부여된) 역할이 인생의 기틀이 되기에, 우리는 건강한 유대를 유지하는 데 애를 쓴다. 관계 유형 너머 실재하는 당사자를 직시하고, 기대 행동의 범위를 예측하고자 한다. 인간 그 자체로 보면 판단이 쉬워지거든.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인 사실은, 자식인 모습은 지우기가 어렵다. 인간이기 이전에 DNA가 관계를 이미 만들어놓은 탓일까. 역할이 숭고한 탓에 오히려 한 걸음이 힘들다. 진짜 민낯을 바라보기가.
# 시선을 맞춘다는 건
영화 <쁘띠 마망>의 모녀, 넬리와 마리옹의 갈등도 비슷한 이유다. 이른 나이에 아이를 낳고 인생이 달라졌던 마리옹. 삶을 받아들이고 풍파를 겪었어도, 새로운 상실엔 여전히 내성이 부족하다. 엄마의 심경을 알고 싶은 넬리에게, 그저 대외적 공문 같은 담담한 이야기만 해줄 뿐이다. 아이 앞에선 든든해야 한다는 압박은, 결국 짐 정리 중에 말도 없이 시골집을 먼저 떠나도록 만들었다. 적어도 무너진 엄마의 모습을 보이진 않을 수 있으니까.
반대로 마냥 해맑은 아이라 할지라도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은 막을 수 없다. 아빠가 잠시 안 보이자, 아빠도 떠난 걸까 무서웠다는 넬리. 이는 상실에 대처할 역량이 안되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일 터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투정이 전부다. 슬픔이 어깨 너머로 보이지만 어른들의 심경을 위로하기엔 깊이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는 아이대로, 부모는 부모 대로의 역할 때문에, 불안은 응석과 체면 사이에서 길을 잃게 된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야 어머니를 정치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내린 결정과 그들이 받았던 구체적인 압력, 정치 체제, 생식 체계를 이해하게 되죠. 가족의 이런 괴로운 위계질서와 어머니와 딸 사이의 평등을 가져오는 아이디어. 같은 날 태어난 자매를 캐스팅한 건 그들 사이의 평등이라는 아이디어를 완전히 확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에 셀린 시아마 감독은, 유전적으로 뛰어넘지 못하는 부모 자식 사이에 판타지를 슬쩍 데려온다. 시골집 뒤쪽으로 펼쳐진 숲속에서, 넬리과 똑같은 나이의 엄마 마리옹을 만나게 한 것. 같은 시선의 위치에서, 같은 수준의 두려움과 호기심을 가진 존재. 감정의 변화도 눈에 보이는 서로의 주파수는 꽤 솔직한 말을 끌어낸다. 오두막 짓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하거나, 묻기도 전에 먼저 자신의 꿈을 얘기해주는 마리옹. 역할에 가려졌던 인간적인 감정과 욕구를 마주하니 비로소 인간 대 인간의 첫 만남이 시작된다.
영화 중간 등장하는 아이들의 역할극 놀이를 통해서도 감독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다양한 캐릭터를 짠 다음, 각자 여러 인물을 맡아서 2인극 놀이를 하는 두 아이. 넬리는 자신이 맡은 역할이 너무 많다면서 불만을 비추지만, 마리옹은 대신 자신의 역할이 크다며 다독인다. 동등한 관계라 해도 하나의 씬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건 결국 엄마인 마리옹인 걸까. 하지만 놀이가 시작되면 그 의심은 금세 사라진다.
“당신은 비밀스러운가요?”
“사실 비밀이란 숨기려는 것만이 아니에요. 그냥 말할 데가 없는 거지”
큰 역할이든 작은 역할이든 극의 비중과 상관없이, 2인극은 결코 혼자서 할 수 없는 놀이. 아무리 열연한다 해도, 그 극에 함께하는 사람이 맞춰주지 못하면 놀이는 망한다. 비밀에 대한 아이들의 즉흥 대사는 외로운 관계의 비극을 짚어주는 듯하다. 마치 부담이 걱정돼서 각자의 불안을 감추고 숨어버리면, 가족의 갈등을 해결할 길을 잃는 것처럼 말이다.
마리옹은 의외로 연기를 잘하는 넬리에게 감탄하고, 넬로는 연기자가 꿈인 마리옹을 응원한다. 이는 아마도 서로의 존재와 역할을 이해하고, 함께 씬을 이끌어 가다 보니 느껴진 마음일 터다. 그렇게 넬리는 “엄마 힘내세요”를 넘어서 인간 마리옹을 안아줄 준비를 밟아간다.
# 순환을 느끼는 순간에
물론 아무리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더라도 자녀를 향한 의무, 부모를 향한 존중은 필요하다. 내가 겪는 오늘의 혼란은, 그 시절을 먼저 겪은 이들의 증언을 통해 극복할 수 있으니까. 당신이 숲속에 숨겨놓은 작은 아지트는, 그 뒤로 난 길을 따라가는 이들에게 결국 발견되니까. 다른 관계와는 달리 인격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역할의 특수성을 기억해야 한다. 한데 그러다 보면 앞과 뒤를 필연적으로 기억해야 하기에, 앞서 말한 순수한 대면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이에 영화 <쁘띠 마망>은 세상을 이해하는 포인트 한 가지를 더해준다. 마리옹의 할머니, 즉 넬리의 증조할머니 이름이 ‘넬리’라는 사실. 따라서 인생은 엄마가 기억하는 할머니가 다시 딸로 돌아오는 순환임을 강조한다. 끝은 다시 시작이 되고, 탄생과 죽음은 하나의 고리로 연결된다는 우로보로스.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은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감싸안는 원형이라 전한다. 나의 흔적을 가진 누군가가 다시 나를 이해하러 찾아오는 것. ‘상상했던 것보다 더 멋진’ 오두막을 만들 수 있던 이유는 그곳에 있을 터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만든 판타지 세계를 들여다보니, "너와 알게 돼서 기쁘다"는 마리옹의 고백은 단순한 우정의 메시지만은 아닌 듯하다. 내 삶에 나타나 준 자녀를 향한 감사이기도, 이를 통해 성장한 자신을 향한 뿌듯함이기도, 앞으로도 계속 순환될 인생에 대한 즐거움이기도 하다. 그러니 혹시 인생이 책임의 부담으로 가득하다면, 넬리가 겪은 어느 숲속의 마법을 기억해 볼 필요도 있겠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있으니까.
근데 그래도 여전히 엄마는 엄마긴 함. 5년을 넘어서 40년을 일궈온 세계도 여전히 김엄마임.
# 영화 후반부에 마리옹은 넬리가 듣고 있던 음악을 들어본다. 마리옹 시대에는 없었을 미래노래. 그런데 나조차도 생소하다. 몽환적이면서 구름위를 날아다니는 듯한 판타지 감성이 가득하다. 검색을 해보니, 영화를 위해 만든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이라고. 그런만큼 가사를 보면 영화의 주제가 조금 더 명확해진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순환의 이야기. 마음 속 이야기를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려면, 얼만큼 마음이 동기화가 되어야 할까.
Si mon cœur est dans ton cœur
내 마음이 네 마음 속에 있다면
Ton cœur, ton cœur est dans mon cœur
너의 마음, 너의 마음이 내 마음 속에 있다면
(La chanson n'aura pas peur De dire ce qu'on a sur le cœur)
(이 노래는 우리 마음속 이야기를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Si ton cœur est dans mon cœur, mon cœur
네 마음이 내 마음 속에 있다면, 내 마음도
Mon cœur est dans ton cœur
내 마음은 네 마음 속에 있어
(La chanson n'aura pas) peur De dire ce qu'on a dans le cœur
(이 노래는) 두려워하지 않아 우리 가슴속에 있는 걸 말하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