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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달 Jan 19. 2024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 집이 내게 안식처일 수 있도록

모험심 강한 칼럼니스트 벤자민 미. 최근 아내를 잃은 그는 그녀의 흔적을 잊지 못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게다가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딜런과는 대화가 어렵고, 어린 딸 리지의 씩씩함 속엔 오히려 엄마의 부재가 스치는 기분이다. 슬픔을 걷어내고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 벤자민은 환경의 변화, 즉 이사를 결심한다. 그리고 그의 앞에 나타난 2만 2천 평의 숨겨진 대지. 벤자민은 곧바로 운명의 집이라 느끼지만, 이곳은 단순히 몸을 뉠 곳이 아니다. 47종의 다양한 동물들과 괴짜 직원들이 상주하는 이곳. 그동안 어떻게 버텨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년간 개장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물원이다. 겪어본 적 없는 사육의 생소함에 발길이 막막한 벤자민. 아직 가족끼리 대화하는 법도 어려운데, 이젠 야생의 언어를 하나 더 배워야 할 차례란다. 우리가 동물원을 샀기 때문에.



하우스의 시대

작년 봄, 얼룩말 한 마리가 서울의 한 주택가를 뛰어다닌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경찰과 소방대원들에 의해 금방 동물원으로 인도되었으나, 기사를 접한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부족해진 서식지로부터 멸종위기종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동물원 옹호론도 있긴 하나, 대다수 여론은 우리를 부수고 뛰쳐나온 얼룩말 ‘세로’의 심경에 집중했다. 초원을 누비는 얼룩말을 가둬놓고 키우는 건 동물권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열악한 환경과 인위적인 번식 과정이 윤리에 어긋난다는 의견들. 사람들은 얼룩말의 입장을 대변하며 가슴 아파했다. 반려견이 열린 문 사이로 뛰쳐나가는 것처럼, 얼룩말 역시 헐거워진 우리를 부수고 나간 것뿐이라는 일부 전문가의 견해도 있었지만 크게 주목받진 못했던 듯싶다. 아마 울타리를 벗어나고자 했던 ‘세로’의 모습 속에 무언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려나. 


인간의 기초생활을 유지하는 필수 3요소로 의식주를 꼽는다. 이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생존에 위협이 되기에, 기본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을 보게 되면 훨씬 마음이 동한다. 한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 의식주에서 집을 가리키는 는 집 주()’가 아니라 살 주()’라는 것.


영어단어에서도 건물 자체만을 지칭하는 ‘House’와 안식처로서 애정이 깃든 ‘Home’을 구분해서 쓰는 것처럼, 우리는 집을 물리적 보호를 넘어 정서적 안정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이처럼 집이라면 응당 보금자리이길 바라지만, 타인처럼 ‘House’ 같을 때가 있다. 정신없이 일한 뒤 돌아와 현관문을 열지만 공허함만 나를 반길 때, 이곳은 그저 하나의 서늘한 공간에 불과하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면 대부분 은행 소유지라 숙박업소와 다름없는 마음이라면, 집안에 기척은 돌아도 온기가 없어 작은 기댐마저 불편해진다면, 네모반듯한 사각형은 더욱 낯설어져 덜컥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나의 생존에 필요한 3요소는 잘 지켜지고 있을까.


영화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의 벤자민도 집을 ‘Home’으로 느끼지 못한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정붙이며 살아온 공간이지만, 지금은 마음 둘 곳 없는 차가운 벽돌일 뿐이다. 아내의 빈자리는 모험가로서 홀로 사용한 시간만큼 커졌을까. 우울한 그림만 그려대는 딜런에게 대화를 거는 방법도 잘 모르겠고, 이웃이 챙겨준 라자냐는 냉장고에 쌓여만 간다. 마치 애정없이 베이스캠프가 되어버린 우리네 집처럼 말이다. 하우스 바이러스에 걸린 듯 안정감이 사라져가는 벤자민의 집. 그는 탈출을 결심한다. 우리가 해석한 ‘세로’의 마음처럼, 생존을 위해.



고립을 여는 열쇠는

아무도 들여봐 주지 않는 공간에 홀로 있다 해서 언제나 외로운 건 아니다. 비교와 경쟁이 만연한 현대사회에서 관계의 디톡스는 가끔 필요한 법,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잃어버린 손목시계를 찾기 위해선 아무도 없어야 초침 소리가 잘 들릴 테니까. 게다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해 에너지를 얻는 긍정적 적막을 넘어, 요새는 혼술과 혼밥 등 고독함이 일상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집이 굳이 다정해야 할 이유를 되묻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무리 없이 충분히 살 수 있는 것 같거든.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집안을 한 번 더 둘러봐야 한다. 고독은 고립의 문고리를 쥐고 있기에. 


영화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에서 벤자민의 가족은 겉으로 보면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아빠는 등교를 책임지고, 아이들은 제시간에 학교에 가고. 리지가 스치듯 전한 딜런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대화는 서툴러도 가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울한 지하 세계를 표현한 딜런의 그림처럼, 이들 사이엔 이상하게도 해가 뜨지 않는다. 교장 선생님은 벤자민에게 아이의 마음을 들여봐 달라고 당부했지만, (동물원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소녀 릴리도 한눈에 알아챘던) 그림 속 태양의 부재를 보지 못하는 벤자민. 이것이야말로 관계만 존재하고 깊이는 희미해진 집, 바로 고독한 ‘House’의 형태일 테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의 가족은 타워팰리스에 산다 해도 햇볕이 비추지 않는 지하 세계 같겠지. 동물원으로의 이사는 분명 우리 가족을 위한 최선이라 생각했고, 슬픔을 억누르며 새로운 환경을 구축해나가는 가장이 되려 했지만, 결국 돌아온 반응은 그건 아빠의 꿈이다제발 나를 도와달라는 딜런의 울부짖음인 것처럼 말이다. 보금자리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했는데, 애꿎은 공간만 두들기고 있었던 것. 서글픈 충돌에 이르러서야 ‘Home’을 향한 힌트들이 꿰어진다. 동물들과 소통을 어려워하는 벤자민에게 대화법이 틀렸다솔직하게 대하라던 사육사들의 조언처럼, 릴리가 딜런에게 전한 쪽지에 그려진 태양처럼, 진정한 안식처엔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는 온기가 필요하다고.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맷 데이먼은 카메론 크로우 감독이 자신을 섭외하기 위해 촬영장까지 찾아와 음악CD를 선물했다고 한다. 음악 저널리스트이기도 한 감독의 캐릭터를 미루어 볼 때, 이 또한 함께 지낼 영화현장을 이해하는 특별한 언어였던 셈. 그는 수록된 곡 중 밴드 ‘Pearl jam’이 부른 <I’m open>이란 노래에 특별히 감동했다고 전한다. 몽환적인 배경음에 “I’m open... Come on in...” 나는 열려 있으니 어서 들어오라고 반복하는 가사. 그러나 아무리 문이 열려 있다 해도 경계심이 생기고, 내가 활짝 열어 놨다 해도 막상 들어온다면 겁이 나는 법. 오롯이 있는 그대로 안식처가 된다는 건 사실 꽤 큰 위험이다. 편히 쉴 곳을 원하면서도 온기를 의심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하지만 맷 데이먼에게 와닿은 이유가 있듯, 영화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를 비춰보면 가사가 가리키는 범위는 우리가 우려하는 기준을 초월한다. 안식처란 내가 이만큼 열고 상대가 저만큼 들어와도 괘념치 않는 상태까지 포함하는 것. 마치 비틀어진 창틀을 고치려는 벤자민에게 좀 삐걱대도 괜찮다사실 그 소리가 좋다고 말하는 교장 선생님의 고백처럼, 집안의 온기는 어느새 존재하는 것이라 알려준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즐거이 듣는다면. 그리고 내가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온기는 혼자선 절대로

영화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의 줄거리를 들으면 어느 정도 결말은 예측된다. 사연 있는 가족이 좌충우돌 부딪치다 결국 동물원을 개장하는 이야기일 테니까. 벤자민의 가족들은 초짜로서 함께 고생하며 전우애도 쌓고, 안전검사원이라는 공동의 적 덕택에 소속감도 얻고, 서로의 밑바닥을 확인하며 왠지 모를 인간애도 차오른다. 그리고 이렇게 얽히고설킨 감정들은 신기하게도 묘한 따스함이 되어 마룻바닥에 깔린다. 그렇게 이들에겐 동물원이 단순한 계약서를 넘어 집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겪기 이전에 이미 감독은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초반에 들려준다. 냉장고에 쌓여가는 라자냐 접시를 보며 언젠간 그 라자냐를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어린 딸 리지. 세 명이 둘러앉아 먹어야 하는 양인 만큼, 단순히 슬픔을 흘려보내야 한다는 의미만으로 들리지 않는다. 딱딱한 벽돌 같은 사이를 녹여주는 건, 마주 보며 음식을 나눠 먹는 식탁에서 시작된다는 진리. 시작부터 감독은 물리적 장소의 변화 이전에 가져야 할 평범한 가르침을 순수한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 전하고 있었다. 적막한 하우스의 세계에서 살아내기 위한 첫 번째 스텝은 그 안에 함께하는 우리를 발견하는 것. 그렇다면 어떤 그림을 그리더라도 자그마한 태양이 슬며시 떠오를 것이라고. 그제야 해맑게 소리치는 리지의 환호가 다시 들린다.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고.









# 처음엔 가사가 언제 나오나, 이 요상한 음악은 무엇인가 싶었지만, 어느새 빠져들게 된 ‘Pearl jam’의 <I’m open> 역시 음못알에겐 예술의 영역이 늘 놀랍단 말야


https://youtu.be/X9i2FCZmr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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