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액땜 그만 하고 싶다.
이상하게도 난 여행을 하면 소소하게 다치거나 무언가를 꼭 잃어버린다. 터키 여행에서는 손톱이 반쯤 찢어져서 안쪽 살이 벌겋게 존재감을 알렸고, 영국 여행에서는 숙소로 돌아와 씻고 나면 내가 모르는 상처들을 발견하곤 했다. 나랑 함께 여행을 가는 내 영혼의 단짝은 여행을 갈 때마다 연고와 밴드, 진통제, 소화제 등등 상비약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곤 했다. 그리고 그걸 쓸 일이 생길 때마다 이것 보라고, 준비해와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했다. 그리고 그다음 여행에서는 철저하게 더 챙겼다.
최근에 친구와 함께 갔던 사이판 여행에서는 드디어 큰일이 났다. 패러세일링을 하러 배를 타러 갔는데 선착장과 배 사이의 단차가 어마어마했다. 난 오른쪽 무릎을 수술한 경험이 있어서 안 그래도 무릎이 안 좋은데 무리하게 내려가다가 사달이 났다. 무릎을 한 번 다쳐본 사람은 안다. 무릎에서 큰 소리가 나지 않아도 뭔가가 잘못된 것 같은 그 느낌적인 느낌. 여섯 번째 감각이라고나 할까. 무릎 수술의 경험이 있는 난 알고 있었다. 이건 뼈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인대나 관절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걸 알아내려면 MRI를 찍어야 한다고. 여행자 보험을 들었지만 낯선 사이판, 그것도 미국령에서 얼마일지 감도 안 잡히는 MRI를 찍을 용기는 없었다. 난 나머지 여행 기간 동안 리조트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 무사히 와서 두 달가량 회사를 쉬며 치료를 받았다.
이번 보라카이 여행은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의 첫 해외여행이다. 부모님과 친구들은 당연히 걱정하며 가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었다. 절대로 뛰지 말고 땅바닥 잘 보고 다니라고 다들 돌아가며 잔소리를 했다. 물론 나도 그러고 싶다. 일단 앞으로 평생 뛰지 않을 것이고, 땅바닥도 진짜 최선을 다해서 보고 다녀야지. 하지만 그것이 맘대로 되나. 사고는 정말 한순간에 일어난다. 그때 배를 타기 위해 선착자에서 다리를 내딛던 그 순간도 매우 찰나였다.
다행히도 같이 가는 또 다른 친구 J는 보라카이만 4번 이상 다녀온 경험이 있어서 의지할 수 있었다. 동남아가 그러하듯 저녁 비행기를 타고 가서 새벽에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 조식까지 챙겨 먹은 우리는 앞으로 일주일간 쓸 생필품을 사기 위해 시내를 나왔다. 한창 공사판인 보라카이 시내를 5분 정도 걸으면 보라카이 대표적인 상점가인 디몰에 도착한다. 그곳 마트에서 우리는 생수와 술안주로 먹을 치즈, 과자, 콜라, 그리고 강한 자외선을 차단해 줄 선크림까지 구매했다. 다 사고 나니 친구와 나 둘 다 손에 짐이 한가득이었다. 이걸 들고 5분을 걸을 순 없었다. 우리는 트라이시클을 잡았고 가격을 흥정한 뒤 올라탔다. 트라이시클을 타고 보라카이 시내를 달렸지만 쾌적하지는 않았다. 트라이시클의 매연과 공사판 먼지들로 숨 쉬기가 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짐을 들고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산 물건들을 정리하고 바다로 나갈 준비를 했다.
바다를 나가려고 하는데 내 휴대폰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두었지? 침대를 찾아봐도 서랍을 찾아봐도 화장실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다. 등골이 서늘하다. J가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본다.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아예 호텔방을 털기 시작했다. 나오지 않는다.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트라이시클에 두고 왔나 봐. 내 추측으로는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어놨는데 주머니가 얕아서 앉은 사이에 빠진 것 같다. 여행 첫날, 그것도 여행을 개시한 지 두 시간도 안 되어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도 나지만 친구 역시 놀라고 당황한 표정이다. 난 친구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우선, 나가자”
“어딜?”
“정신을 차려야지. 스타벅스 가자”
“더 찾아보자”
“아냐, 안 나와. 거기서 빠진 게 맞는 거 같아”
그 와중에 나는 밀짚모자와 선글라스, 셀카봉을 챙겼다. 친구 휴대폰을 셀카봉에 끼고 바다로 가는 골목길에서 우리 둘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이건 휴대폰을 잃어버린 기념 셀카야”
“푸하하”
내 말에 친구가 좋다고 웃는다. 우리의 머리 위를 점령했던 검은 구름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리고 골목 사이로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점점 바다가 커질수록 내 마음속 검은 얼룩도 빠르게 사라졌다. 난 바다 수영은 질색인 전형적인 수영장 파다. 하지만 저 바다색의, 파란색과 초록색이 절묘하게 섞여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저 바다색의 한가운데에 뛰어들고 싶었다.
“우선 스벅에 가서 커피를 한잔 하고 다시 호텔로 가서 수영복을 입고 오자”
“오늘 수영 안 한다며?”
“아냐. 해야겠어”
우리는 스타벅스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소세지롤, 와플을 시켰다.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는 어딜 가나 맛이 비슷해서 익숙한 고향의 향기를 느꼈다. 스벅에서 고향의 향기라니 웃긴 말이지만 여행지에서는 정말 그렇다. 그리고 소세지롤이 너무 맛있었다. 스타벅스이면서 와이파이도 되지 않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풀렸다. 난 한 시간도 안 되어서 휴대폰을 잃어버린 일은 그냥 잊기로 했다.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을 계속 곱씹으면 나만 기분이 안 좋을 뿐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난 휴대폰을 3년 동안 써서 바꿀 시기가 되었고 다행히도 공항 도착했을 때 필리핀 유심으로 바꿨기 때문에 내가 원래 쓰던 한국 유심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유일하게 마음 아픈 일은 3년 간 찍은 사진을 죄다 날렸다는 점이다. 내가 3년간 여행하면서 찍었던 많은 사진들과 동영상들, 우리 고양이 사진과 영상들을 왜 나는 백업하지 않았나~! 심지어 아이폰을 쓰면서 아이클라우드에 사진 저장도 하지 않았다. 아이폰을 쓴 의미가 전혀 없다.
휴대폰이 없으면 불편하겠지만 난 책도 욕심껏 3권이나 가져왔다. 몇 년 전에 사서 이제는 터치도 잘 안 되는 아이패드 미니도 가져왔다. 아이패드 안에는 전자책이 가득하다. 인터넷 좀 안 하면 어떠한가. 대신 휴대폰 보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책을 열심히 읽자. 그리고 실제로 휴대폰 없이 하는 여행은 많이 불편하지 않았다. 우선 멀쩡한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동행인이 있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일은 동행인의 휴대폰을 빌렸다.
바다에서 실컷 놀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깨끗이 씻었다. 친구 휴대폰에 엄마와 내 단짝 친구 연락처를 입력하자 카톡 친구가 떴다. 두 사람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내 카톡으로 로그인을 할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 바보가 아이패드 미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패드에서 카톡을 깔지도 않았다. 하하. 도대체 왜 나는 아이폰을 쓰고 아이패드 미니를 가지고 있나. 예상대로 가족과 친구 모두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걱정 한가득이다. 난 정말 아무 일도 없었고 그저 내가 부주의해서 잃어버린 거라고 말을 하며 안심시켰다. 안 그래도 딸이 필리핀을 간다고 하자 친한 미용실 아주머니가 여행 갔다가 공항에서 지나가던 사람이 들고 있던 휴대폰을 확 채갔다며 너 도착하면 조심하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하루도 안 돼서 딸이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하니 우리 엄마가 순간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간다.
“아냐 엄마. 그냥 액땜했다고 생각할래. 이번 여행 덕분에 더 안전할 거야. 정신 똑바로 차리게 됐어”
“너 사이판에서 다쳤을 때도 그랬잖아. 액땜한 거라며!”
“그래서 그때 무사히 돌아왔잖아. 하하”
그러고 보니 사이판에서 다쳤을 때도 액땜이라고 했구나. 하지만 다친 덕분에(?) 회사도 두 달간 합법적으로 쉬었다. 그동안 영어공부로 하고 글쓰기 수업도 들었으며 브런치에 글도 쓰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는 일 투성이다. 새옹지마라는 말을 나만큼 신봉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여행 첫날, 침대에 누워서 나는 이번 액땜으로 나에게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날까 상상했다. 우선 책을 한 줄이라도 더 읽을 것이고, 휴대폰에 눈을 떼지 못하는 대신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최선을 다해 음식 사진을 찍는 것보다 이 음식의 향기와 맛을 기억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무료한 시간에 친구와 더 많은 대화를 할 것이다. 이번 액땜으로 나에게 더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믿어본다.
그래도 이왕이면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만 일어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