쿄 매클리어의 <완벽한 계획에 필요한 빈칸>를 보고
매일매일 계획을 짜는 리스트가족(The Liszts)이 있다. 이들은 사계절 내내 메모를 하고 계획을 짠다. 메모는 온 집안을 채우게 되고 이들이 소중히 생각하는 것은 메모리스트 자체인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의 리스트는 각자가 몰두해 있는 것들을 보여준다. 굉장한 수집광이거나 관심사에 깊이 빠지는 사람들 같기도 하다. 그러니 이들이 미쳐 있는 목록 이외의 집안 일 같은 것이 과연 잘 돌아갈까 싶다. 물빠진 수영장 바닥에 놓인 아이의 세발 자전거가 그들에겐 일요일의 휴식보다 더 급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원서 제목인 The Liszts의 뉘앙스는 리스트가족, 리스트(목록)를 의미한다. 그리고 같은 리스트인 프란츠 리스트(피아니스트)가 이마에 리스트 메모장을 붙이고 첫 페이지부터 등장한다.
리스트가족이 메모한 리스트는 이러하다.
1. 무시무시한 질병 리스트
2. 멋진 축구 선수 이름 리스트
3. 하기 싫은 귀찮은 일 리스트
4. 날개 달린 곤충 이름 리스트
5. 신나는 놀이 리스트
6. 좋아하는 것 리스트
7. 질문 리스트
8. 좋아하는 사람 리스트
9. 무서운 악당의 이름 리스트
10. 더 신나는 놀이 리스트
11. 시커먼 것들의 리스트
이 목록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으니, 바로 3번 <하기 싫은 귀찮은 일>과 7번 <질문> 리스트이다. 3번은 아빠의 리스트인데 <하기 싫은 귀찮은 일>로 무너져 내린 울타리 손질하기와 지붕 고치기가 있었다. 왠지 아버님의 마음이 보이는 것 같다. 얼마나 하기 귀찮았으면 기록해 두었을까? 울타리와 지붕 고치기를 하지 않고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 하긴 나부터도 to do list에 계속 남아있는 것은 곧바로 못하는 일이나 하기 싫은 일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어떤 경우엔 기록을 하는 것만으로도 다 했다고 치는 경우도 있다. 은근히 찔리는 대목이다. 7번은 둘째 에드워드의 <질문>목록이다. 다른 가족의 목록과는 조금 다르다. 둘째는 자기가 궁금한 것을 적었다. 그런데 둘째는 질문을 적은 이유가 '한밤중에 머릿속이 빙빙 돌아서'라고 한다. 왠지 이 둘째, 좀더 살펴줘야 할 것 같은 괜한 엄마의 마음도 든다. 목록 적기에 바쁜 가족이 그럴 여유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날 혹시 몰라 둘째 에드워드가 열어둔 문으로 낯선 남자가 들어온다. 에드워드는 그에게 인사를 하지만 가족은 그가 목록에 없기에 신경쓰지 않는다. 이 남자가 헝가리의 그 유명한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와 닮았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이 남자와 닮은 리스트의 초상이 집 벽에 걸려 있는데도 말이다. 알록달록한 풍선을 가진 리스트를 닮은 이 남자가 집에 들어와 한 일은 바로 아빠의 <하기 싫은 귀찮은 일> 목록에 있던 울타리를 손질하고 지붕을 고치는 일이었다. 그는 꽃에 물도 주고, 자신을 보고 헤어디자이너냐고 묻는 큰 딸 위니프레드의 말을 듣고 당장 머리카락도 단정히 자른다. 이 남자는 지금보니 한마디를 들으면 바로 실행하는 사람이다. 목록에 있든 없든 그 집에 당장 필요한 것들을 손보고 자신도 손보고 늘어지게 낮잠도 잔다. 목록에 있는 일을 하기란 이리도 쉬웠는데 말이다.
에드워드는 곧 이 낯선 남자도 궁금한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서로의 질문을 공유한다. 그런데 이 과정이 나에겐 목록을 만드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했다. 에드워드는 그에게 목록을 만들어 준 것은 아닐까? 목록을 만들어 놓으면 잊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 둘은 지붕에 앉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기도 하고 남자가 가져온 풍선으로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기도 한다. 둘은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그 남자의 "우리는 어디에서 온 걸까?" 와 "내 바지는 어디에 있지?"라는 질문이 공존하는 리스트라니, 나도 마트에서 장보는 목록 옆에 "나는 어떻게 늙을까?”같은 질문을 적어보겠다.
프란츠 리스트 (Franz Liszts, 1811-1886, 피아니스트).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리스트이다. 그 남자의 헤어스타일과 닮았다. 첫 장면부터 등장하여 작가의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스트도 리스트를 피해 갈 수 없었다.(초상의 이마를 보라) 프란츠 리스트와 리스트 가문의 리스트 초상, 할아버지의 좋아하는 사람들 리스트 속의 리스트. 리스트 하나로 가족도 만들고 목록도 만들고 그 유명한 리스트도 소환하는 재미가 이 그림책의 큰 주제만큼이나 재미를 준다.
마지막 장면은 다양하고도 특별한 뜻밖의 손님들이 리스트 가족의 집초인종을 누르고 있다. 그러고보면 이들은 문을 꼭 닫고만 있으면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다. 리스트 가족은 여전히 계획을 짜고 메모도 한다. 리스트를 남기는 것도 여전히 중요한 일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목록의 마지막 칸을 늘 비워 둔다고 한다.
나에게도 뜻밖의 손님이 찾아오게 하면 어떨까? 그 손님은 좋은 일일 수도 있고 나쁜 일일 수도 있다. 위기나 기회일 수도 있다. 어쩌면 목록을 갖추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문을 닫아두면 그 어떤 것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리스트 가족처럼 계획을 짜고 목록을 만들자. 낯선 남자처럼 당장 해치우자. 그리고 에드워드처럼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문을 열어두자. 이 책 덕분인지 나도 문을 열어 두었다. 문 밖에 서있는 것에도 이름을 붙여 두었다. 그것은 바로 '시도'이다. 당신도 이미 문을 열어둔 것을 안다. 당신의 문밖에는 무엇을 세워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