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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가는대로 Jun 28. 2024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아직 은퇴할 나이는 아니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은퇴 이후를 가끔씩 생각하곤 합니다. 과연 은퇴 이후에 내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우스개 소리로 남자들은 은퇴하면, 부인, 아내, 집사람, 와이프, 애들 엄마가 필요하고, 여자들은 돈, 딸, 건강, 친구, 찜질방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저도 아내만 있으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내는 꼭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면서 제 아내에게도 필요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스개 소리로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정말 내가 가진 것이나 사회적 위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는 시간이 왔을 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오늘 하루를 조금 더 의미 있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얇은 동화책이 함께 생각이 납니다. 한 아이와 함께 자라는 나무는 어릴 때는 소년에게 놀이터가 되어주고, 성인이 되어가면서 열매와 가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루터기만 남기고 몸통까지도 내어줍니다. 그렇게 떠나간 소년은 노인이 되어 돌아옵니다. 마지막으로 노인이 된 소년은 앉아서 쉴 곳이 필요하다고 했고,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쉬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저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희생과 사랑을 배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마지막에 필요한 것은 그저 앉아서 쉴 작은 공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거기에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 함께 하고 싶은 사람도 생각하게 합니다. 소년이 나무를 떠난 후에 노인이 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노인이 된 후에도 소년의 마음속에는 그 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힘이 다 빠져서, 그저 쉴 곳이 필요한 순간에 나무에게로 가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소년에게 나무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힘들 때 찾아가면 힘을 얻을 수 있는 곳말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코린토2 8,15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많이 거두나 적게 거두나 수확물을 모두 공동체의 것으로 하고 똑같이 나눠가졌는지 모르겠으나, 오늘 말씀에는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고만 적혀있습니다. 사람마다 필요한 정도가 달랐을 겁니다. 가족의 수에 따라서도, 나이에 따라서도, 어쩌면 체격에 따라서도 달랐을 것입니다. 많이 거둔 사람은 좀 넉넉히 가져갔을 수도 있습니다. 적게 거둔 사람은 미안해서 조금 가져갔을 것도 같습니다. 과정이 어쨌든 간에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았습니다. 많이 필요한 사람이 많이 가져가지만 소비할 수 있는 만큼 가져간 것이고, 적게 거둔 사람이 자기가 거둔 것보다 더 가져가더라도 최소로 필요한 만큼만 가져갔기에 모두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서로의 노고에 감사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박해라는 상황과 심판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초대교회 신자들이 내일을 걱정하기보다 오늘에 감사하며 살게 했을 것입니다.


은퇴를 하면 제게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아마도 편히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과 그 공간에서 가끔씩 잔소리를 주고받더라도 말상대가 되어주고 온기를 나눌 사람, 거기에 가끔씩 그 공간으로 찾아와 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제가 가끔은 편안한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구경을 할 용기와 힘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주님의 곁으로 떠날 수 있다면 정말 잘 살았구나라고 제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도 막연히 아웅다웅 하루를 살아가며 곳간에 무언가를 계속 채우고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많으면 좋겠지, 언젠가는 필요하겠지라고 쌓아두는 것에 의미를 두고, 제가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불필요한 것은 넘쳐나고 꼭 필요한 것은 모자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꼭 필요한 것은 주시는 주님 안에서 물질적 여유가 아닌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제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소중히 사용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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