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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우리가 무엇을 더 쓸 수 있나?

by 시sy

프란츠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현악 4중주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후로 우리가 무엇을 더 쓸 수 있겠는가?"


마크 트웨인도 비슷한 말을 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란 없다. 모든 아이디어는 기존 아이디어의 조합일 뿐이다."


내가 어떤 글을 쓰든 새로운 것은 없다. 말해야 할 것은 이미 말해졌고 쓰일 것은 이미 다 글로 쓰였다.

순전히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는 위대한 천재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고 있다. 뭐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공감한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내 생각 중에 독창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니 허망하고 초라하다.


따져보면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원리다. 내가 어떤 교육도 받지 않았다면, 심지어 언어를 배우지도 못했다면 아무것도 말하지도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말하고 쓰는 것은 수많은 데이터를 입력한 결과이다. 내가 받아들인 데이터에는 역사적 사실도 있고 사실관계도 있으며 사실들 간의 함수와 그 함수의 조합으로 체계화된 지식도 있다. 이 많은 데이터 세트 중에 온전한 나의 창작물이 있을 리 없다.


존경하지만 이해하기는 힘든 비트겐슈타인의 명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도 100% 순수 창작물은 아니다. 기원전에 출생한 고타마 붓다(이하 부처님)는 14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하가? 육체와 영혼은 동일한가, 다른가? 등등 이러한 질문들은 정확히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이라 분류한 주제들에 속한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새로운 건 없다.

내가 쓴 모든 글은 앞선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재조합한 것이고 남들이 수없이 모방한 것을 또 모방한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다. 죽자고 찾아보면 유사한 주제로 누군가 이미 썼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다.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앙드레 지드가 핵심을 지적했다.

"말해야 할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기에 다시 말해야 한다"


사실 내가 부끄럽고 초라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이유다. 나 자신을 베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매일 똑같은 글을 반복해서 쓰고 있다. 재탕 삼탕으로 나 자신의 생각을 우려 먹으면서도 쓰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바로 이 사실이 나를 허망하게 만든다. 그게 무엇일까?

반성해 보면 나는 늘 한 가지에 대해 쓰고 있다. '삶은 허망하고 무의미하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이유를 찾고 무너지지 말자.' 결국 다 이 소리 아닌가? 서두를 바꾸고 표현을 달리 하지만 전부 같은 이야기다.


상황이 이런데 내 글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게 가능할까? 내 글 어느 구석에 온전히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나?


너무도 다행스럽게 저작권이 보호하는 것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오히려 인류가 쌓아 올린 아이디어는 남김없이 공유되는 것이 옳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더니 저작권이 보호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디테일이다.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창작은 불가능하다. 작가의 창의성은 구체적인 단어의 선택과 배열, 표현의 방식에서 나온다. 비슷한 표현을 끌어다 썼다 해도 맥락에 따라 독자를 화나게 할 수도 따뜻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게 작가의 능력이다.


뭐 이런 식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있지만 사실 자신은 없다. "현실 세계의 사물은 이데아의 모방이고, 예술은 그 현실 세계를 또 모방한 것이니 모방의 모방이다."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이 위로하지만 소용없다. 신을 모방했어도 모방은 모방이다.


그러니 노력하자. 조금이라도 새로워질 수 있도록. 작은 돌 하나를 더 쌓아 조금이라도 새롭고 독창적일 수 있다면 결코 게을러지지 말자. 늘 똑같은 소리를 해대며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무너지지 않기 위해 글을 쓰고 있지만 오늘은 조금 달라지자. 그래야 나아갈 수 있다.

한발, 한 걸음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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