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시지프스 신화
내가 차장이었을 때 팀장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곱창에 소주를 먹고 싶어 했다.
"O차장, 저녁에 약속 있어?"
회사에서 하루 종일 얼굴 맞대고 있는 사이라 표정만 봐도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약속이 없다 하면 백퍼 같이 곱창 먹으러 가자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난 곱창을 싫어했다. 물컹한 식감도 별로지만 완전 지방 덩어리를 몸속에 투입해서 안 그래도 기름진 몸땡이를 더 기름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빼려면 몇 km를 뛰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약속 있다고 거짓말하자니 곧 시무룩해질 네모난 표정이 떠올랐다. 인간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아도 수년간 함께 해쳐온 역경이 있었기에 매몰차게 내치지도 못하는 딜레마, 이놈의 전우애만 아니면.
"곱창은 안됩니다. 다른 걸로 하시죠."
나름 타협을 시도했지만 실패, 그것도 예상했다.
저녁 8시쯤 업무가 끝나, 둥근 알루미늄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 곱창을 굽기 시작하니 8시 30분이 넘었다. 가뜩이나 늦은 저녁에 곱창이라니.. 원래라면 가볍게 저녁을 해결하고 체육관에 있을 시간이었다. 어제도 운동 못 했는데. 답답한 마음에 건배도 없이 앞에 있는 소주잔을 들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천천히 마셔. 아직 다 굽지도 않았는데."
고양이 쥐 생각해 준다더니, 이제 와서 날 신경 쓰기나 한다는 말인가. 노릇노릇 구워지는 곱창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팀장 얼굴을 보니 후회가 밀려왔다. 거절했어야 했어!
곱창집에서 곱창을 빼고 나면 먹을 것이라고는 김치 밖에 없었다. 후식으로 나오는 된장찌개를 먼저 시켜 먹을 수도 없고.
"왜 안 먹어?"
내가 곱창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천연덕스럽게 같이 먹자고 권한다. 나는 먹는 시늉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예 못 먹는 음식도 아니고 예의로 한점 씹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곱창을 굽고, 소주를 마시고, 김치를 먹고, 이게 다였다.
여럿도 아니고 겨우 둘이서 한 명은 곱창을 굽기만 하고, 나머지 하나는 먹기만 한다. 완벽한 역할 분담이랄까? 팀장도 더 권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른 이야기를 했다. 곱창만 빼면 우리 사이에 아무 문제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자리가 파하고 각자 집으로 가는 길에 허기를 느꼈다. 빈속에 소주만 한병 때려 마셨으니 속이 쓰린 것일 수도 있었다. 기껏 같이 저녁 먹고도 팀장에게 점수를 따기는커녕 마이너스만 늘렸다. 게다가 운동도 물 건너갔다. 이건 뭐지? 그래, 자존심은 지켰어!
카뮈의 시지프스는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에 비해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그리스신화의 시지프스는 코린토스의 왕으로, 신을 우습게 보고 여러 차례 속여 먹다가 결국 큰 바위를 정상에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모두 알다시피 이놈의 바위는 정상에 올라가면 가만있지 않고 다시 굴러 떨어진다. 그 바위를 무한반복으로 정상에 밀어 올려야 한다는 게 이 형벌의 묘미다.
여기서 질문, 어차피 굴러 떨어질 바위를 안 밀어 올리면 어떻게 되나?
그리스신화에서는 시지프스가 바위를 밀지 않으면 더 큰 형벌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멈추거나 쉬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하기 싫어도 강제로 형벌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카뮈의 시지프스는 다르다. 그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린다. 왜 그럴까?
직장인들의 일상은 반복된다.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집안 일 하고 쉬었다가 잔다. 이런저런 소소한 변화들이 생겨나 신경을 긁기도 하고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큰 틀에서 바뀌는 것은 없다. 사실 직장인이 아니라도 대부분의 하루는 반복된다. 사는 게 만만치 않아 지루함을 느낄 수 없다고 해도 반복되는 건 사실이다.
시지프스가 매일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이나 매일 출근하는 것이 무의미한 반복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를 꼬박 열심히 산다고 해서 인생이 업그레이드 될 것도 아니고 행복한 미래가 보장되지도 않으며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늙고 병들어 못 움직일 때까지 일상을 반복할 것이다.
비슷한 궁금증이 생긴다. 왜 그러지?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고, 비슷한 하루가 반복되는데 왜 계속 그래?
"시지프스 이 바보야. 그거 하지 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미련하게 왜 매일 바위를 밀어 올려?"
이렇게 나무랄 자격이 있는 걸까? 내가 하루를 사는 게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보다 쉽기는 해도 무의미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시지프스의 형벌보다 더한 하루를 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산다. 왜?
카뮈는 본질적으로 삶에 의미는 눈곱만큼도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데도 인간은 끝없이 의미를 찾는다. 그것이 카뮈의 부조리다. 의미가 없는데 의미를 찾고 신이 없는데 신에게 의지한다. 그럼 어떡해? 어차피 살아봐야 아무 의미 없으니 다 죽을까? 매일 커다란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도 비슷한 고민에 빠졌다. 올려놔 봐야 다시 떨어지는데 하지 말까? 그냥 죽을까?
다행히도 이런 뭣 같은 상황에 대해 카뮈는 이렇게 하라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삶은 부조리하다. 그 부조리함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그것이 반항이고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위엄이다. 내 선택으로 이 부조리한 삶을 살아갈 때 나는 자유로운 주체가 된다."
미치겠다. 이보세요. 카뮈 선생님, 그건 좀 궤변 아닌가요? 어떻게 그게 내 선택이고 자유의지인가요? 협박당해서 매일 바위를 밀어 올리는데 무슨 위엄이 있나요? 차라리 바위를 부숴 버리고 개기는 게 내 존엄을 지키는 행위 아닐까요?
모르겠다. 사실 바위를 부수고 난장을 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분명히 어제보다 더 큰 바위가 시지프스 앞에 생겨날 것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또 그걸 밀어 올리게 할 것이다. 그게 신이니까. 바로 그게 부조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조리한 현실을 빠져나갈 묘수는 없다. 시지프스가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있지도 않은 시지프스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매일 회사를 가면서 갈 곳조차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위로하면서, 거의 매일 똑같이 하루를 반복해서 살고 있는 나는 어떤 태도로 세계를 마주해야 할까?
회사를 때려치울 수도 없고 한강 다리에서 몸을 던질 수도 없다. 꿈도 희망도 없지만 살아가는 수밖에. 한 걸음 나아간다 믿고 또 걸어갈 수밖에. 이것이 내 선택이다.
느낌이 온다. 카뮈가 말한 자유와 선택과 위엄이 무엇인지 쫌 알 것 같다. 나는 이 부조리한 세계를 살면서 무너지지 않을 자유가 있다. 부조리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명확하게 인식하면서도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인다. 조금은 당당하고 위엄도 있어 보인다. 자존심을 지켰기 때문이다.
시지프스에게 남은 것은 커다란 돌덩이와 자존심밖에 없었다. 자기 합리화라고 평가절하하겠지만 묵묵히 바위를 밀어 올림으로써 운명에 저항한다. 무너지지 않음으로써 존재의 위엄을 보인다.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다.
제발이지 그의 자존심만은 건드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