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퍼런스 플레이어
김부장은 엄밀히 부장이 아니다. 10년쯤 전에 실제 부서장을 맡은 적이 있었지만 그 뒤로는 평사원과 다름없이 일했다. 그럼에도 모두 그를 김부장이라 부르는 이유는 달리 부를 호칭이 없기 때문이었다. 퇴직이 얼마 안 남았으니 부서의 최고참 선배인 데다 회사 임원 중에도 그의 입사 동기가 있었다. 그래서 김부장,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당연하게 그리 불렀다.
김부장은 회사에 꼭 필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회사는 김부장에게 꼭 필요했다. 그래서 남았다. 동기들이 승진해서 임원까지 올랐지만 자존심을 팔지언정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래도 등가교환 원칙에 따라 월급값은 하자는 주의였기에 누구도 김부장을 싫어하지 않았다.
김부장은 회사의 중간값이었다.
'김부장만큼만 하자'는 그 정도 해야 조직에서 살아남는다는 뜻이었다.
'김 부장만 못해'는 회사에 민폐라는 뜻, 곧 쓸모없어 잘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반면 '김부장 보다 잘하겠지?'라는 말을 들었다면 임원 승진도 가능하다는 평가다.
김부장의 존재감은 적었다. 꼭 필요하지 않으면 정례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연륜에서 오는 전문성이 있었기에 투명인간은 아니었다.
"그건 김부장님께 물어보면 되겠네."
"그러네요."
후배들은 편하게 물었고 김부장은 AI처럼 응답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정확히 거기까지. 후배들에게 김부장은 지피티처럼 호출할 때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김부장은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꿰고 있었고 구성원 개개인의 특성을 면밀하게 파악했다. 그래서 적절하게 자기 할 일을 찾아 필요한 만큼만 처리하면서 쓰임을 증명했다. 월급과 등가교환!
김부장이 우리를 관찰하는 방식으로 나도 김부장을 관찰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충분히 능력 있어 보이는데 왜 반투명하게 사는 것일까?
"김부장님은 인생에 원래 욕심이 없으세요?"
"원래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이사 승진에 물 먹고 나니 이렇게 된 거지."
"저도 얘기 들었는데, 그게 정말 다일까요? 아닌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면 어느 순간 자신 없더라. 아무리 궁리해도 내가 가진 조건으로는 이 게임에서 딱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더라고. 도전하면 절반의 확률로 잘 되거나 망가지는데, 그건 너무 불확실하잖아. 망가지는 건 싫고. 그런데 궁리해 보니 지지 않을 방법은 있더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사실 말이야. 우리가 사는 이 시스템은 이길 사람만 이기게 만들어져 있어. 그러니 이길 능력이 없는 사람은 이기려는 순간 패배 확정이야. 그러니 어떡해? 지지 않는 방법에 집중하는 거지."
"지지 않을 방법요? 그런 게 있어요? 이기는 것 아니면 지는 거지."
"있지. 리퍼런스 플레이어가 되는 거야."
'Reference'는 기준점, 참조물, 비교 대상이란 뜻이다. 리퍼런스 플레이어를 풀이하면 '비교의 기준으로 기능하는 인간'을 뜻한다.
RPG 게임으로 치면 평균적인 캐릭터에 해당한다. 게임을 설계할 때 밸런스나 난이도, 시스템 조정은 모두 이 캐릭터를 기준으로 맞춘다. 스펙은 이 정도, 강도나 민첩성은 이 정도, 주인공도 NPC도 아니지만 게임에 기준이 되는 캐릭터, 그게 리퍼런스 플레이어다.
게임에서 리퍼런스 플레이어는 사용되지만 주목되지 않는다. 필요하지만 존중받지 않는다. 계속 참조되지만, 결코 모델이 되진 못한다.
현실에 적용하면 크게 성공하지도,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지도 않은 인간들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는 데 있어 기준점 역할을 한다. 법, 정책, 광고, 대중 문화, 교육 시스템 모두 이 정도 인간을 기준으로 삼는다. 절대 주목 받지 않지만 세상의 모든 구조가 이들을 중심으로 튜닝된다.
리퍼런스 플레이어 본인은 슬플 수 있다. 비극일 수 있다. 원래 쓸모가 그런 것이라니.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리퍼런스 플레이어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중차대한 역할을 한다. 이들은 중간값을 유지하는 생존 샘플로서 자신이 겪는 고통과 패배, 버팀과 침묵, 모두 다른 플레이어들의 기준이자 안도감의 출처가 된다. 그래, 나는 '저 사람'보다 나아. '저 사람'보다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지.
게임 시스템처럼 우리 사회도 리퍼런스 플레이어의 존재를 묵인하고 활용하며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리퍼런스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그 역할이 곧 생존 전략이다. 적도 없고, 관심도 없고, 기대도 없으니까, 끝까지 살아 남는다.
망하지 않는 인간, 버려지지 않는 인간, 단지 시스템 안에서 참조만 되는 인간, 기억은 안 나지만 항상 있었던 인간, 그게 리퍼런스 플레이어다. 결코 이기진 않지만, 사라지지도 않는 유일한 플레이어이기도 하다.
리퍼런스 플레이어가 되려면 일정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누구도 부러워하진 않지만,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레벨은 돼야 한다. 게다가 그만의 전술이 있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지는 싸움엔 참여하지 않는다.
-시스템을 비난하지 않고 그 안에서 틈을 찾는다.
-가치를 만들지 말고 시스템의 보상을 착실히 획득한다.
게임의 흐름을 바꾸지 않으면 표적이 되지 않는다. 시스템 바깥의 오류처럼 작동하면서 모든 흐름을 관찰한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리퍼런스 플레이어만의 승리 공식이다. 결코 지는 법이 없다.
승자는 죽어도 리퍼런스 플레이어는 죽지 않는다. 시스템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존재다.
“기억되지 않는 존재, 그러나 사라지면 시스템이 흔들리는 존재.”
그게 진짜 리퍼런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