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로, 하트 페어링, 하트 시그널, 솔로지옥, 환승연애, 동싱글즈, 연애남매, 끝사랑...
최근 방송가에는 연애 관찰 예능이 인기를 끌고 있다. 게다가 각종 멜로 드라마와 영화까지, TV만 보면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생활은 전혀 다르다.
2024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20-40대의 미혼 남녀의 71.7%가 현재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사랑의 특권층이나 다름 없는 20대도 60% 이상이 연애 중이 아니라고 답했고 30% 가량은 아예 연애 경험이 없다고 한다. 왜 연애를 하지 않느냐의 질문에 37.8%가 연애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뭐 이딴 질문이 다 있나 싶지만.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하는거지만, 시시콜콜 이유를 따지기 좋아하는 학자는 연애가 줄어든 사회적 현상에 대해 대충 5가지의 원인을 지적했다.
-개인주의: 남의 기분까지 신경 쓰기 귀찮다.
-경제적 불안정: 연애할 돈 없어.
-경쟁과 피로: 다른 것도 경쟁할 거 너무 많아. 연애에 쏟을 에너지 부족.
-연애 효용성 하락: 따져보면 연애의 효용성은 마이너스가 당연하다. 효용성 따져 연애 하나?
-사회적 시선 변화: 요즘은 솔로라고 뭐라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연애 못 하면 '하자 있는 인간'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5가지 원인을 나열하고 나니 그럴듯 하지만 다 비슷한 소리다. 연애를 해서 얻는 득보다 실이 많고, 연애를 대신할 것이 얼마든지 있으니 안 하는 것이다. 게다가 연애 관찰 예능도 NO연애시대에 한몫했다. TV만 틀면 연애를 간접 경험할 수 있는데 힘들여서 내가 연애할 이유가 없다!
인간의 심리는 괴이하다. 남들 연애하는 것을 보면 나도 연애하고 싶다라는 결론이 나올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남의 연애를 보며 울고 웃는 것은 좋은데 내 연애는 귀찮다니..
다른 면에서 보면 요즘 사람들이 계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서야 연애가 미친 짓이며 사랑하는 동안 나는 정신병자가 된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렇다면, 뭐 다행스러운 일이다.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사랑에 빠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들은 병적 상태와 유사하다.
강박적 사고 (계속 그 사람만 생각함)
현실 왜곡 (단점은 안 보이고, 이상화됨)
감정 기복 (기다림, 실망, 희열, 불안 등)
자기 파괴적 충동 (거절당하면 자살 시도까지 가기도 함)
사랑에 빠져 미친 놈이 돼 본 사람은 이런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잘 알겠지만 반대로 연애 경험이 없다면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랑이 얼마나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는지. 혹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합리적 판단이 마비된 일시적 정신 착란 상태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 일부 연구에서는 사랑에 빠졌을 때의 뇌 활동이 강한 마약을 복용했을 때와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사랑의 감정이 정신병이니 아니니 논쟁하자는 게 아니다. 따져 보면 인간의 행위 중에 완전히 멀쩡한 게 있기나 한가? 관점에 따라 뭐든 미친 짓으로 보면 다 그렇게 보인다. 특히 남이 하는 짓들이.
사랑의 시대가 끝났다. 나만 이리 느끼나?
지고지순한 사랑이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다른 모든 것을 물리치고 마지막에 정의와 행복을 독차지하는 서사를 떠올려 보자. 예전에는 통했다.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아니다. 틀린 것까지는 아니라도 이제는 지루하다. 드라마를 보다가 썸타던 연인이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면 짜릿하지 않고 하품이 나온다. 10초 앞으로 가기 클릭! 아직도 해? 10초 더!
1년 쯤 전에, 가수 화사가 성시경의 유튜브에 출연해 돌직구를 날렸다. 전 발라드가 싫어요. 발라드 전문 가수 앞에서 발칙하다 못해 무례한 발언이었지만 성시경의 답변이 너무 훌륭하다. 발라드는 단절에서 나오는데 스마트폰의 출현으로 요즘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다는 것.
예전에 이별은 정말 끝이었다. 이사라도 가면 전화번호 바뀌고 얼굴 한번 보고 싶어도 만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스치듯 안녕' 같은 제목이 나오고 '보고 싶다'는 말을 가사에 반복해서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별해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인스타 보면 어디에 있는지 지금 뭐 먹고 있는지도 안다. 그런데 뭐가 궁금한가? 궁금한 건 하나뿐이다. '너는 얼마나 잘사는지 보자.' 이 정도 아닐까?
사랑에 목매던 시대가 끝난 것도 발라드와 이유가 비슷하다. 전주와 함께 부드럽게 시작했다가 절정에 가서 본론이 나오고 간주 나오고 한번 더 비슷하게 불렀다가 잔잔하게 끝나는 발라드는 성시경의 말처럼 기승전결이 있다. 기승전결이 있는 것은 뻔하고 멜로 드라마의 클리셰처럼 지루하다. 저거저거 키스한다!
그래서 서서히 시작했다가, 혹은 시작도 못했다가 그리워하는 방식의 사랑은 현대인에게 맞지 않는다.
연애 관찰 프로그램을 보다가 지루한 장면이 나오면 빨리 감기가 가능하다. 내가 연애하면 어느 단계에서도 빨리 감을 수 없고, 아무리 아쉬워도 되감을 수 없다. 그러니 연애가 피곤하고 효용성이 떨어진다. 내가 직접 할 필요도 없다. 남이 하는 연애에 간섭하는 게 훨씬 재밌다.
그리스 신화로 거슬러 올라가면 애초에 사랑이란 건 인간이 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만들 목적으로 고안된 장치였다. 의도가 불순한 감정이다. 인간이 지금의 한계를 뛰어 넘어 더 높은 지성체로 도약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본성 중 하나일지 모른다. 역으로 사랑의 감정이 평가절하된 이유가 인간이 진화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 소모적인 감정에 휘둘리기 보다 좀 더 효율적으로 행동하라!
그러나 신이 괜히 신인가? 신이 만들어 놓은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연애는 안 해도 부모나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극진할 수 있다. 인간은 안 사랑해도 반려견을 사랑할 수 있고, 연애는 포기해도 미식은 포기 못할 수 있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뭐든 훌훌 털어내는 게 쉽나?
아침에 커피 사러 갔다가 메모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김O연 여기 오지마. 네가 없는 이곳은 사슬없는 감옥이야!' 뭔 소리야?
커피를 사서 신호등 바뀌기를 기다리는 중에서야 글쓴이의 감정이 이해됐다. 너무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은 모순적인 감정, 바로 사랑이다. 에이, 몹쓸!
그래, 사랑은 버린다고 치자. 사랑과 이별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나? 자기계발에 열중해 발전한 인간이 될 수 있나? 아니면 내 사람만 사랑하지 않고 남의 연애에 집착하거나 가상의 관계에 빠져 그만큼의 열정을 허비하나? 요즘 지피티와 노는 시간이 늘었다.
혹시라도 사랑과 이별에서 획득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상실감에 허우적거리지는 않을까? 자유와 외로움은 언제나 등가이니.
어쩌면 사랑에 벗어났다는 자신감도 속임수인지 모른다. 단지 옛날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을뿐 디지털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게 아닐까?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소비하고, 리모컨으로 넘기면서.
그러면 그렇지. 3천 년을 지속해온 서사가 이리 쉽게 무너지나?
나는 실패할 것이다. 이리도 지나간 것에 집착하는 내가 사랑과 이별하지는 못한다. 상실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그런 체할 수는 있어도.
그러니 후대에 맡긴다. 너희는 결코 사랑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