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멩코의 고장 세비야의 추억
세비야에 도착해 렌터카를 반납하고 나니 온 가족이 홀가분해졌다. 스페인 남부 여행을 하면서 렌터카 덕에 이동이 편리했지만 그만한 부담이 있었다. 사고 걱정, 주차 걱정, 반납 걱정 등등 너무 오랜만에 해외에서 렌터카를 빌린 이유도 있겠지만 여행 가방만 들고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때보다 짐이 훨씬 많아진 느낌이었다. 소유한 게 많으니 걱정이 늘어난 느낌. 아, 이래서 무소유...
여행이 며칠 남지 않기도 했지만 2 번째 렌터카를 반납하고 나니 이제부터는 정말 속 편하게 여행을 즐기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렌터카도 없는데 무슨 걱정거리가 생기겠느냐며.
세비야 중심가의 스페인광장에 들어섰을 때, 경이로웠다. 1928년, 비교적 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라고 하지만 그 웅대함과 아름다움은 바티칸 광장과 비견됐다. 거의 20년 전에 세비야에 출장 왔던 것을 가지고 세비야는 가봤다고 말했었는데 그 당시 스페인 광장도 방문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나는 세비야에 처음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시는 성토요일, 세마나 산타 행렬 준비를 앞두고 온통 북적거렸다. 우리는 스페인 남부 중에서도 세비야의 형제단 행렬이 가장 웅장하다는 것을 이야기를 들었기에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행렬은 어차피 밤에 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전에 미리 예약해 뒀던 플라멩코 공연을 보기로 했다. 플라멩코 보고 나오면 딱 행렬 시작! 뭐 이런 계획이었다.
호텔에서 공연이 열리는 플라멩코 박물관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였다. 우리는 구시가를 가로질러 걷기로 하고 조금 여유 있게 나섰다. 그런데 웬일? 행렬 준비 때문에 시민들의 통행을 제한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형제단 행렬이 중요하다고 해도 이곳에 와 있는 관광객이 얼마인데 구시가 한가운데를 전면 통제하다니.. 조금 돌아가면 되겠지 하며 조금씩 구시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구시가 전체가 행렬 코스라도 되는 것인지 어디로 돌아가도 목적지에 다가갈 수 없었다. 바로 저 앞인데도 경찰이 좁은 길을 못 건너게 한다. 그 길로 행렬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공연 시간은 다가오고 아무리 길을 따라 내려가도 계속 통제, 길만 건너면 되는데 10미터 폭도 안 되는 길을 못 건너다니. 어이없고 당황스럽다. 어떡해야 하지?
"차라리 택시 타고 도시 외곽을 돌아서 가자."
200미터 앞에 도착하기 위해 6킬로미터를 돌아가자는 제안이었지만 그 수밖에는 없었다. 우리는 이제까지와는 정 반대 방향으로 걸어 구시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마구잡이로 택시를 잡았다. 처음 두 번은 모두 행렬 때문에 그쪽으로 가기 어렵다는 대답을 하는 것 같았다. 스페인어 알아듣지 못한다. 이런 순간에는 파파고도 쓸모없다. 그래도 눈치가 그랬다.
플라멩코 못 보는구나. 거금을 날리는구나. 패배의 그림자가 우리 모두의 얼굴에 드리워질 무렵 마지막 잡은 택시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빙 돌아서 가보겠다는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그래, 인생 도박이지! 갈 데까지는 가보자.
시간은 촉박하게 흐르는데 구시가를 빠져나간 택시는 한가롭게 강변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돌기만 하다가 우리를 아무 데나 내려주면 어쩌지? 구글맵을 켜보니 외곽으로 돌기는 했지만 목적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았다. 택시 기사의 양심을 믿는 수밖에. 택시 타고 돌아서 간다고 욕은 해도 일부러 돌아서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진짜 한 바퀴를 완전히 돌아 도시 반대편에서 구시가를 들어가는데 다시 경찰이 막아선다. 아.. 우리의 운은 여기까지인가? 렌터카를 반납했것만 고난은 끝나지 않는다. 원래 그런 것인가?
"플라멩코 박물관까지 얼마나 남았어?"
"600미터?"
"좋아. 내려서 뛰자."
공연 시작 10분 전, 온 가족이 구글맵에 의지한 채 세비야 구시가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차량의 출입은 막았지만 사람까지 막지는 않았다. 골목마다 관광객이 넘쳐 나지만 통제 때문에 다들 목적지에 가지 못해 웅성거렸다. 우리야 아예 차를 타고 반대편으로 왔으니 갈 수 있어도.
공연 시작 3분 전, 도착! 선착순이라 맨 뒷줄밖에 남지 않았지만 볼 수 있는 게 어디냐?
조그만 소극장이라 뒷줄이라 해도 무대와의 거리는 5미터 남짓에 불과했다.
현란한 플라멩코 기타와 삶과 죽음을 노래하는 남녀 가수의 열창, 그리고 세 명의 플라멩코 댄서가 보여주는 격정적인 몸짓.
고향이 없어 평생 떠돌면서 소외당하고 억압당했던 집시들의 반항과 울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격렬하지만 구슬프고, 애처롭지만 강한 플라멩코 음악! 좋았다. 엄청 고생해서 공연을 사수할 가치가 있었다. 고작 200미터를 앞두고 6킬로를 돌아오느라 택시가 추가로 들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다음 날, 드디어 귀국 날짜가 도래했다. 코스는 단순했다. 세비야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고 마드리드 도착, 마드리드 아토차 역에서 공항까지 공항버스로 이동, 비행기 탑승, 끝. 어떠한 변수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또 시련이.
여행 내내 예상치 못한 변수에 시달렸기 때문에 기차역에는 출발 30분 전에 도착했다. 전광판을 보니 우리가 타고 갈 기차가 몇 번 플랫폼에서 타야 하는지 표시되지 않았다. 너무 빠른가? 그런데 15분 전이 됐는데도 표시되지 않는다. 뭐가 잘못됐다. 또 뭐야?
알고 보니 우리는 기차역 내 왼편에서 전광판을 보고 있었는데 우리가 탈 Iryo 고속열차는 기차역 내 오른편에서 수속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느 곳에도 안내문이 없었는데. 1~7번 플랫폼은 일반 열차, 8~14번 플랫폼은 고속열차란다. 그래도 그렇지, 전체 기차의 출도착을 알려주는 전광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테러 위협 때문인지 일일이 엑스레이로 수화물 검사까지 하는 통에 엄청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긴 줄의 맨 뒤에 서서 기차를 놓치지 않을까 노심초사. 역무원에게 가서 기차표를 보여주며 10분 남았다고 읍소했지만 그냥 맨 뒤로 가란다. 헐~ 우리 안 타도 그냥 갈 거면서.
블로그를 검색해 보니, 세비야 기차역의 이런 괴이한 문제로 기차를 놓쳤다는 관광객이 한 둘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기차가 문 닫기 직전에 우리는 올라탔다. 열차 문 닫는데도 한번 더 표 검사를 하는 역무원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심지어 거기 못 탄 사람도 있었다.
온몸에 땀이 뻘뻘. 툭하면 연착한다는 스페인 기차가 그날따라 얼마나 정시에 출발하는지.. 기차 놓쳤으면 비행기 놓치고 비행기 놓치면 한국 못 오고.. 생각하기도 섬뜩한 연쇄 불안감 때문에 좌석에 앉아서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게다가 늦게 타서 짐칸이 가득 차, 5유로짜리 짐 표까지 구입했음에도 캐리어를 제대로 넣지 못했다. 캐리어가 굴러 떨어질까 불안해서 또 계속 돌아보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식이라면 마드리드에 도착한다고 해도 제대로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우리가 돌아오고 얼마 있지 않아 스페인 대정전 사고가 났다. 지하철도 멈추고 ATM 돈도 못 찾고 인터넷도 다운됐다는... 만약 그런 사고에 맞물렸다면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더니. 여행이 끝나지 않으면 일정이 어그러질 변수는 끝까지 남아 있었다. 이번 여행의 교훈 중 하나였다. 인생도 비슷하다. 죽어야 끝난다. 죽지 않는 한 여러 위험과 고난은 언제든 생겨날 수 있다. 아, 진짜 왜 이렇지? 이것도 부조리하다. 왜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나?
"인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서두를 것 없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부족함이 없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후대에 남긴 유훈이다. 원래 인생 맘대로 안된다는 단순한 말인데도 은근 위로가 된다. 그래 다 그래. 원래 마음대로 안돼.
그래도 하나쯤은 맘대로 되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게임을 하는지 모르겠다. 난이도 조절만 잘하면 게임에서 나는 무적이 되고 신이 된다. 좁은 가상 세계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맘대로 할 수 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맘대로 할 수 있어야 숨통이 트일 것 같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맨날 꼼지락꼼지락.
참 마음 같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나마 적응하고 살고 있지만은 죽을 때까지 완벽 적응은 어려울 것 같다. 그 적응이란 게 꼭 옳은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냥 사는 것이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남들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 나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