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드디어 끝났다. 나에게 명절은 쉬는 날보다 이번에도 넘어야 할 미션에 더 가깝다. 할머니의 지휘 아래 약 일주일 전부터는 냉장고의 사용권이 박탈되고, 3일 전에는 모든 빨래를 완료해 정리해두어야 하며, 이틀 전에는 방을 싹 치워 가족들이 머무를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전날 아침, 온갖 전들을 부쳐놓으면 드디어 다했나 싶지만 마지막 미션이 남았다. 만들어둔 음식을 3일 내내 먹어야 한다는 것.
달걀과 고기와 기름으로 한껏 포장된 명절 음식들. 한 끼만 먹어도 충분한데 이걸 3일 내내 먹으려니 몸에 무리가 간다. 소화가 버거워 몰려드는 졸음, 묵직해진 배와 잔뜩 부은 것 같은 얼굴까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무언가 클렌징이 될 것 같은, 섬유질이 그득그득 들어가고 수분을 잔뜩 머금어 먹자마자 소화가 될 것 같은 것.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다이어트에 한창 혈안이었을 때, 시절 숨 쉬듯 먹던 음식이 떠올랐다. 코끼리 샐러드의 겨울버전 마녀수프였다. 컬리를 켜서 토마토 2kg와 셀러리 한 단을 주문했다. 오늘 한솥을 끓여두고는 또 다른 3일 내내 먹을 작정이었다.
마녀수프는 진입장벽이 낮은 음식은 아니다. 비주얼도 그렇게 예쁜 편이 아니고, 익힌 채소맛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호의 영역에 가깝다. 하지만 한번 마녀수프의 맛을 알아버리면 몸이 무거울 때 생각나는 마성의 음식이라는 것만큼은 자신한다. 특유의 건강한 맛이 중독적이다.
보통 마녀수프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하나는 스톡을 넣어 맑게 끓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토마토 페이스트를 넣어 조금 더 진득하게 끓이는 것이다. 나는 철저히 명절 해장용 수프를 만들 것이므로 전자를 택했다. 핀란드에서 사 온 베지스톡이 또 마침 남았다. 저 멀리 있던 본능을 더듬어 수프를 끓일 준비를 했다. 양파, 양배추, 당근, 토마토, 셀러리를 비슷한 크기로 썰어두고 양파와 토마토는 분리해서 담아두었다.
재료 넣는 순서를 다르게 하면 더 좋은 맛이 난다는 문숙 님의 말이 기억났다. 올리브유를 아주 살짝만 둘러 양파를 먼저 달달 볶는다. 양파가 투명해지면 당근, 양배추, 셀러리순으로 넣어서 볶아준다. 셀러리는 대보다는 이파리 부분을 쓴다. 셀러리 대가 흐물흐물해지는 것보다는 이파리를 먹는 쪽이 더 낫기도 하고, 나중에 그냥 씹어먹기에는 대가 더 맛있다.
굳이 물을 넣을 건데 볶아야 하나 생각한 적이 있다. 근데 요리를 해보니까 열을 채소에 직접 닿게 할 때 맛이 더 좋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정도 열을 먼저 가해 맛을 좀 응축시켜 두고 물을 부어 끓일 때 더 맛있었다. 토마토를 제외한 나머지 재료들이 충분히 숨죽였을 때 물을 붓고 스톡을 넣은 후 10분 정도 끓인다. 토마토는 감칠맛의 역할이라 맨 마지막에 넣어야 좋다고 한다. 토마토를 넣고 5-10분 정도 더 끓이면 완성이다. 오래 끓일수록 더 진한 맛이 난다.
한술 떠 입에 넣으니 '이거지'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앉은자리에서 한그릇 뚝딱이었다. 기름의 맛도 육식의 맛도 쏙 빠진 오롯한 채소의 맛. 이번 명절도 비로소 끝났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부엌을 내 마음대로 쓰고, 냉장고에 좋아하는 식재료들을 다시 넣어두니 마음이 편해졌다. 해장을 하며 지난 명절을 돌아보았다. 미션 속에서도 웃음과 담소가 오가던 순간. 마치 술자리 다음날 해장하며 '아 어제 그래도 웃겼는데' 하던 것과 비슷했다.
갑자기 '이제 다음은 8월이다' 하던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며 잠깐 무서워졌다. 모쪼록 다음 명절까지 또 모두가 무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