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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가 Jun 13. 2023

아무튼, 아침산책

그런 시기가 있다. 정신없이 하루를 살아내지만 그저 살아내는 것에 급급해서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것인가 의문이 드는 시기. 동시에 능력과 태도에 불신이 생기며 걷잡을 수 없이 조급해지고, 허전해지는 나날들이 계속되는 시기.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자다 깨는 날이 많아지는 시기.


해가 길어진 탓일까. 매일 아침, 6시에는 눈이 번쩍 떠졌다. 알람을 맞추어 둔 시간은 7시. 다시 자기에는 짧고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지는 않은 1시간 차이. 왜 하필 지금 눈이 떠지나 하며 야속함을 느끼고 나면 알람은 또 금세 울리며 나를 깨우곤 했다. 피곤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6시 3분. 평소보다 더 진하게 정신이 말짱했다.


‘차라리 지금 일어나서 몸을 좀 빡시게 굴리고 오늘 꿀잠을 자볼까’


억지로라도 다시 잠을 청하는 대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손에 닿는 추리닝을 주섬주섬 꺼내 입고는 문을 열었다. ‘벌써 나가나?’ 묻는 할머니에게 ‘아니 그냥 운동 좀 하고 올게’라는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나를 일찍 깨우는 빛의 근원으로 들어갔다. 나무사이로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을 보고 있으니 새삼 ‘깨어났다’는 느낌에 흠뻑 젖어들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썩 괜찮게 느껴졌다. 백예린의 산책을 틀어두고는 산책로를 따라 쭉 걸어갔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5월 말의 날씨, 콧속으로 들어오는 공기냄새를 한껏 맡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6시 남짓인데도 산책로에는 사람이 많았다. 주로 어르신분들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운동을 하는 분들에게서 한껏 생명력이 느껴졌다.

‘아침 좋네’ 하며 걸어가는 찰나, 조깅을 하는 아저씨가 나를 추월하더니 두 팔을 쭉 뻗어 한껏 스트레칭을 하며 뛰어갔다. 저분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나도 뛰어야겠다.’


양귀비가 한껏 피어있는 건너편 조깅도로로 향했다. 텐션 높여줄 어텐션을 틀어두고 한발 두발 굴렀다. 뛰는 방법은 잘 모르지만 몸은 앞으로 살짝 숙이고 다리는 가볍지만 단단하게 딛고 뻗었다. 2분 남짓 뛰었을까. 허리는 뻐근해지고 호흡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노래가 끝나지 않았는걸. 노래가 끝날 때까지 딱 다섯 번만 더 양 발을 힘차게 굴러 나아갔다.


숨이 차고,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머리에도 열이 솟았다. 모자를 벗어던지니 시원함이 느껴졌다. 길을 틀어 양귀비 밭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천천히 두리번거리며. 조금 걸었을까, 저 멀리서 휴대폰을 든 할머니가 다가오더니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했다. 빨갛게 피어난 양귀비 꽃밭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할머니 사진을 찍으니 나도 괜히 실실 웃음이 터졌다.


‘오, 나 지금 좀 행복하다’


평소라면 짜증으로 가득했을 아침시간에 행복한 순간이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덥다가 느껴지는 시원함. 숨이 가쁘다가 느껴지는 여유. 마치 추울 때는 따뜻한 순간에, 더울 때는 시원한 순간 그 찰나에 느껴지는 행복이 있었다.


환기의 순간에 느껴지는 행복. 이것은 환기를 위한 이전의 상황을 충분히 겪어야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어쩐지 지금의 시기와 닮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열등감과 고통의 상황들을 겪다 보면 어떠한 순간에 성장의 환기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도 생겼다.


땀과 열기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7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피곤함에 잔뜩 인상을 구기며 9분 후 일어나기를 눌러야 할 그 알람을 아무렇지 않게 툭 끄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어쩐지 개운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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