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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우림 Oct 27. 2023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대신 도가니탕 어떠세요

아빠가 매달 한번씩 주말 저녁마다 요리로 실험정신을 발휘하는 이유

우리 집에는 특이한 가풍(?)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족구성원이 음식을 돌아가며 만드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외식보다는 집에서 먹는 걸 더 선호한다. 그래서 집에서 매일같이 요리를 해야 하는 엄마의 수고를 덜어주고자 아빠가 만든 우리 집안의 특별한 규칙이다.


그나마 요리에 흥미가 있는 나는 유튜브 쇼츠를 보며 얼추 그럴싸한 요리를 만드는데 반해, 요리에 전혀 관심이 없는 동생 놈은 늘 배달어플의 힘을 빌린다. 특이한 건 아빠의 요리인데, 본인 차례마다 일요일 저녁상에서 약간의 실험정신을 보여주시곤 한다.


하루는 식탁에 범상치 않은 크기의 통조림이 놓여있었다. 거대한 통조림 한가운데에는 '우건탕' 세 글자가 우렁차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아빠 말로는 도가니탕에 쓸 도가니라고 했다. 도가니가 뭐냐고 물으니 부들부들하고 고소한 맛이 나는 돼지무릎 부분이라고 했다.


뭔지는 몰라도 아빠의 들뜬 목소리에 설렘반 기대반으로 기다린 일주일. 긴 시간을 기다려 먹은 도가니탕은 아빠에겐 미안하지만 '혼돈의 도가니'였다. 국물은 350g에 천원돈 하는 시판 사골육수를 사용한 맹탕국이었고, 도가니는 먹을 때마다 입안에서 서걱서걱 씹혔다. 


도가니탕을 처음 먹어보는 나로선 도가니탕이 원래 이런 맛이 나는 국인지, 아빠의 미숙한 요리실력으로 인한 졸작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멋쩍게 웃으며 더 팔팔 끓였어야 했다고 나지막이 변명하는 아빠를 보니 원래 도가니탕의 맛은 아닌 것 같았다.


그로부터 몇 달 뒤였나, 인왕산으로 가볍게 등산을 가려고 했는데 아빠가 반색을 하며 맛집을 여러 가지 알려주셨다. 그러고는 독립문 근처가 바로 아빠 고향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서울이 고향이고 종로 인근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독립문 쪽인 줄은 처음 알았다.


어릴 때 인왕산을 놀이터 삼아 친구들과 쏘다니다가 허기가 지면 그 영험하다던 선바위 근처에 고이 모셔진 옥춘을 몰래 먹었다고 했다. 선바위 앞에 과일이며 떡이며 올려놓고 비나이 다하는 어른들의 마음은 하나도 모르고 사탕을 몰래 빨아먹고는 입을 쓰윽 닦았을 철없는 꼬마를 생각하며 조금 웃었다.


인왕산에 올라가기 전에 아빠가 알려준 맛집에 먼저 들렀다. '대성집'이라고 하는 해장국집인데 아빠가 젊었을 때 자주 갔던 곳이라고 했다. 알고보니 올해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을 받은 맛집이었다. 간판만 봐서는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음식점과 하등 다르지 않았다. 대신 기다랗게 늘어진 대기줄이 간판 대신 이곳이 여전히 맛집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메뉴는 간단했다. 도가니탕, 선짓국, 수육 끝. 도가니탕 두 개를 시키자 국밥이 무슨 패스트푸드처럼 금방 나왔다. 대기줄에 20분 정도 서있던 탓인지 조금 허기가 졌던 나는 김이 펄펄 나는 국물을 한입 마셨다가 고양이처럼 하악질을 했다. 


한입 먹자마자 이곳이 맛집이긴 맛집이구나 했다. 맑으면서도 깊은 국물은 과장 좀 보태서 빨대라도 꽂아 먹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맛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 멋진 도가니탕을 기념하고자 사진을 찍었다.

 


메인인 도가니탕 외에도 깍두기, 양념마늘, 배추김치 딱 세 가지 찬, 간장, 밥뿐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허투루 내온 것이 없었다.


도가니는 푹 삶았는데도 잡내 하나 없이 쫀득하고 녹진했다. 간장에 콕 찍어 먹으니 그야말로 술을 부르는 맛이었다. 등산을 가기로 약속하지 않았다면 반주로 가볍게 한잔 했을지도 모르겠다.


밥을 말아먹다 보니 깔끔하지만 약간은 심심한 국물이 아쉬웠는데, 젓갈향이 가득한 김치나 시원한 깍두기, 양념한 마늘과 먹으니 궁합이 아주 좋았다.


정신없이 13,000원짜리 만찬을 즐긴 후 힘이 펄펄 나는 몸을 이끌고 인왕산 지락길을 거닐었다. 비록 아빠가 일러준 선바위는 끝내 찾지 못했다. 하지만 철없던 꼬마가 쏘아 다녔던 산길을 걸으며 충분히 아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아빠의 투철한 요리 실험정신은 젊은 시절 너무나 맛있게 먹었던 도가니탕으로 자신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구현해 내려던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빠의 바람대로 인왕산 뒷자락을 타고 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먹은 도가니탕을 꽤 오랫동안 추억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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